2019년 11월 24일 일요일 저녁 베를린
독일 사람들은 오래된 친구가 많다. 유치원 때부터 알던 친구,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과 긴 우정을 유지한다. 그런 우정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에게도 고향 친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독일 생활을 함께 시작한 뒤셀도르프 어학원 친구들!
독일어 기초반에서 두 달동안 함께 공부한 알렉스는 호주에서 온 친구다. 알렉스는 뮌헨에서 일을 하다 작년에 베를린으로 오게 되었고, 나는 괴팅엔에서 대학을 다니다 베를린으로 오게 되었다. 몇 년 만에 다시 같은 도시에 살게 된 것이다.
알렉스와 금요일 저녁에 보기로 했지만 갑자기 알렉스 회사에 일이 생겨 일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일요일에 성당에 가니 오전 11시 이전이나 오후 1시에 시간이 된다고 했다. 알렉스는 나에게 독일어 미사인지 한국어 미사인지 물어보았다. 동네 성당의 독일어 미사라 하니 알렉스도 미사에 오겠단다.
12시 동네 성당 앞에서 만난 우리는 함께 미사를 드렸다. 보통 12시 미사는 할아버지 신부님인 요셉 신부님이 하신다(성당에는 여러 신부님이 계신다). 요셉 신부님 강론은 재미있고 감동적인 데다 짧아서(매우 중요!) 인기가 많다. 요셉 신부님 강론을 기대하며 갔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예비 신부님이 강론하셨다. 가르멜 수도회 소속인 예비 신부님(부제)은 6개월 동안 우리 성당에 계시며(독일어로는 Praktikum) 강론을 하고 성당의 여러 행사에도 참여하신단다. 6개월 후에는 진짜 신부님이 되신다고. 그래서 오늘 강론은 예비 신부님이 하셨다.
예비 신부님 강론은 지루했다. 어린이 미사 때부터 지루한 강론에 훈련이 잘된 나다. 집중하는 척하면서도 강론을 귀담아 듣지 않는 고도의 기술을 갖고 있다. 천천히 정확한 발음으로 말씀하시는 예비 신부님의 강론은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용이 지루하다는 걸 눈치챈 뇌는, 예비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을 자동으로 귀 밖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예비 신부님의 강론은 내 귀를 스치기만 하고 흘러나갔다. 덕분에 나는 강론 시간 동안 여러 가지 흥미로운 생각을 했다. 강론이 거의 다 끝났을 즈음 문득 예비 신부님께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첫 강론이 완벽하지 않은 (지루한) 것은 당연한데, 내가 너무 성의 없이 귀 밖으로 다 흘려보낸 것은 아닌가 싶었다. 예비 신부님은 첫 강론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책상에서 고민하셨을까? (신부님의 강론 스트레스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오늘 강론을 하며 얼마나 떨리셨을까? 정확한 발음으로 천천히 말하려 노력하시던데! 내가 마음을 다해 강론을 이해했으면 참 좋았을텐데 말이다. 미안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중해서 눈 반짝이며 듣더라. 마음이 놓였다. 나 말고는 다 열심히 들었군! 뭐 나도 집중하는 척은 했으니 예비 신부님은 눈치채지 못하셨을 것이다.
(옆에 앉은 알렉스는 몇 번 하품했다. 나에게만 지루한 시간은 아니었나보다.)
미사가 끝나고 베를린 문학의 집(Literaturhaus)으로 향했다. 문학의 집에 가기로 한 건 알렉스의 아이디어였다. 나도 며칠 전 산책을 하며 발견한 곳이었다. 건물이 예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문학 작품 관련 행사가 열리는 문학의 집 1층에는 멋진 카페가 있다. 정원을 지나 유리문으로 들어가니 고풍스러운 벽과 천정이 보였다. 사람이 많았지만 두 명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있었다. 알렉스는 샐러드를 시켰고 나는 연어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기로 했다.
주문을 끝내고 알렉스에게 크리스마스 초콜릿 달력을 선물했다. 알렉스는 처음 받아보는 초콜릿 달력이라며 기뻐했다. 우리가 선물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지만, 며칠 전 나는 알렉스를 위해 특별히 초콜릿 달력을 준비했다. 몇 년 전 뮌헨에서 만났을 때도 이번 2월 베를린에서 만났을 때도 매번 알렉스가 밥을 샀기 때문이다. 학생인 나에게 외식비가 큰돈이라는 걸, 직장인 알렉스는 알고 있는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꼬리뼈를 다쳐 물리치료를 받았던 것, 그 중간에 Hexenschuss가 와서 허리 디스크인 줄 알고 깜짝 놀랐던 것, 사랑니 네 개 발치와 충치 치료를 세 군데 했던 것, 요가와 명상을 시작한 것, 인생에서 큰 도전이었던 집에서 공부하는 법을 배운 것(나는 집 밖에서만 공부가 잘 된다. 집에는 침대도 있고 재미있는 책도 있어 집중이 어렵다. 주변 환경에 영향 많이 받는 스타일), 지지난 주부터 베를린 글쓰기 센터의 글쓰기의 날에서 만난 친구들과 뽀모도로 시간 관리법으로 함께 공부하는 것, 크리스마스 방학 가족 여행 계획 등.
마지막에 내가 한 말은 Der Unfall hat sich gelohnt! 였다. 꼬리뼈를 다쳐 학업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아 마음 고생을 했지만 덕분에 명상과 요가, 적극적으로 작은 행복 찾기, 책 읽기, 글쓰기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집에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한 엄청난 수확도 있었다. 집에서도 공부를 잘하게 된 나는, 세상에 못 할 것은 없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에게 많은 일이 있었던 동안 알렉스에게도 큰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결혼! 남자 친구 이름도 알렉스인 알렉스-알렉스 커플은 지난 10월 말 결혼을 했다. 호주 태생인 여자 알렉스(나의 친구)가 시드니에서 대학을 다닐 때, 독일 사람인 남자 알렉스는 호주로 교환 학생을 왔다. 수업에서 만난 두 알렉스는 좋은 친구로 지냈단다. 남자 알렉스가 독일로 돌아간 후에도 둘은 계속 연락을 하며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독일과 호주의 중간인 뉴욕에서 만나 여행하며 연인이 되기로 했단다. 그 후 시드니에서 대학을 졸업한 여자 알렉스는 호주에서 일을 하다가 독일에 왔다. 유럽에서 일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남자 친구와 가까운 곳에 살며 지내고 싶었다고. 그렇게 둘은 몇 년 동안 서로를 알아갔다. 몇 달 전 알렉스-알렉스 커플은 뉴욕으로 여행을 갔고, 남자 알렉스는 여자 알렉스에게 프러프즈를 했다. 여자 알렉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단다. 친구에서 연인이 되기로 한 뉴욕에서 프러포즈를 받아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베를린의 예쁜 시청 건물에서 두 알렉스의 가족이 모여 작고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며 알렉스는 내게 그날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여자 알렉스는 아름다웠고 남자 알렉스는 기뻐보였다.
이 외에도 우리는 일, 학교, 가족, 미래에 어디에서 살지, 오늘 해야 할 일(빨래, 방 청소, 저녁 식사 준비, 공부)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을 먹고 나온 우리는, 문학의 집 앞에서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셀카를 찍었다. 몇 년 전 밤베르크에서 만났을 때처럼. 산책 겸 지하철역까지 걸으며 알렉스 회사 이야기와 나의 학업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까지는 거리가 너무 짧아 다음 역까지 걸었다. 나에게도 고향 친구가 있어 기뻤다. 처음 독일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성장을 가깝고도 먼 거리에서 지켜봐 준 친구가 있어서. 우리는 꼭 안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빠르면 12월 말, 늦어도 내년 초에는 꼭 만나기로 했다.
이어지는 글 - 요셉 신부님의 일요일 12시 미사
지난 2월 알렉스를 만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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