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나

2020. 9. 4. 22:23일상 Alltag/가족 Familie

 

2020년 9월 4일 아몬드를 먹으며 글 쓰는 금요일 오후

 

 

 

아빠와 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아빠와 딸이라 가지고 있는 여러 생물학적 공통점 외에도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책에 흠뻑 빠졌다. 꼭 읽고 싶은 한국 책도 생겼다. 내가 고르고 골라서 한 두 권 한국 집으로 주문하면, 아빠는 독일에 사는 나에게 보내주신다. 아빠는 책을 보내기 전에 읽어 보시고 짧은 감상도 말씀해주신다.

 

아빠와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사서 보내기도 한다. 3년 전 크리스마스 방학 때의 일이다. 한국에 가기 두 달 전에  KOICA ODA 교육원 에서 만든 <국제개발협력> 두 권을 부모님 댁으로 주문했다. 개발협력 분야에 대해 알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두 달이나 일찍 책을 주문한 이유는, 아빠가 그 책을 읽고 내가 가고자하는 길에 대해 알아주셨으면 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3주를 보내고 독일로 돌아가는 날 버스 터미널에서 아빠와 책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경제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이미 개발협력 분야를 알고 있었다 하셨다. 책을 보며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되셨다고 했다. 아빠는 나보다 훨씬 더 일찍 이 분야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아빠에게 (개발협력) 교육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인지도.

 

아빠와 대화하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내가 독일에서 다른 공부를 할 수도 있을 거라 예상하셨단다. (나는 한국에서 음대를 졸업했고 독일에서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나만 알고 있는 계획이라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음악대학 졸업반일 때, 가족 나들이에서 내 계획을 살짝 언급한 적은 있었다. 

 

"나중에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 문화예술과 관련 된. 유네스코 같은 국제기구 말이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들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 스스로도 과연 가능한 일인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가족에게는 음악 관련된 진로 외에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독일에 왔다. 어학원을 다녔던 1년 동안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때 나이가 25살이었고, 진로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인생 처음으로 20대 중반이었고, 다시는 진로를 바꿀 수 없을 만큼 많은 나이라 생각했다. 큰 용기를 가지고 사회과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의 정체성을 '사회과학도'라 여길 수 있을 만큼 자꾸 무엇인가 분석하는 습관이 생겼다. 

 

다시 독일로 처음 왔던 시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독일로 떠나기 전 날, 엄마 아빠는 서울에 오셔서 내 짐을 함께 싸주셨다. 그리고 남은 짐을 정리하여 가져 가셨다. 그때 아빠는 내 짐에서 <나는 유엔으로 간다: 국제기구 근무 희망자를 위한 종합 안내서> 책을 발견하셨다고 한다. 아빠는 그 책을 읽으면서, 작은 딸이 독일에 가서 다른 공부를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셨단다.

 

이제는 관심 분야가 생기면 한국집으로 책을 보낸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아빠께 슬며시 보여드리는 것이다. 벌써 그 분야 책을 세 권이나 보냈다. 한 권은 아빠가 읽고 보내주셨고, 두 권은 아직 한국에 있다. 아빠가 나의 진로 고민을 알아채셨을까?

 

책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아빠가 계셔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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