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2일 목요일 밤 베를린
계기: 인생 수업 1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류시화 옮김
<인생수업>은 평소에 손이 가는 책은 아니다. 빨리 휘리릭 읽고 싶은 책도 아니다. 독일의 한인 이민 1세대 관련 자원봉사 교육을 받으며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할 때, 가까운 사람이 아프거나 세상을 떠났을 때, 내가 아플 때, 인생에서 변화를 맞이할 때 등 삶의 중요한 시기에 읽게 되는 책이다. 쉽게 들여다보지는 않지만 곁에 있다는 것으로 위안이 되는 책이다.
책을 처음 읽을 때 어색한 부분을 마주하기도 했다. '영혼', '우주의 모든 힘이 해방되는 것', '평화' 등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표현 때문이었다. 어색함이 있을 때 내가 접해왔던 종교를 떠올려보았다. 성당을 다니며 배운 것, 스님 책을 읽으며 얻었던 불교적 지식 등. '영혼'이라는 단어를 읽으면 가톨릭 분위기를 떠올리고 '우주, 마음의 평화' 를 보며 스님의 책을 떠올렸다.
독서 카드
한 남자가 건강이 몹시 안 좋은 70대 후반의 자기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분을 보내드리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요. 난 간신히 용기를 내어 말했죠. '할머니, 전 할머니를 보내 드릴 수 없어요.' 이기적으로 들리리라는 건 알았지만, 그게 내 진심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난 만족한단다. 내 삶은 멋지고 완벽했어. 더 이상 내 모습이 생기로 가득 차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난 이미 이 여행에서 많은 것을 누렸어. 삶이란 마치 파이와 같지. 부모님께 한 조각,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조각, 아이들에게 한 조각, 일에 한 조각, 그렇게 한 조각씩 떼어 주다 보면 삶이 끝날 때쯤엔 자신을 위한 파이를 한 조각도 남겨 두지 못한 사람도 있단다. 그리고 처음에 자신이 어떤 파이였는지조차 모르지. 난 내가 어떤 파이였는지 알고 있단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알아내야 할 몫이지. 난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이 생을 떠날 수 있단다."
그 남자는 내게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난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난 그분을 보내드릴 수 있었어요. 그 말씀이 그렇게 만든 거죠. 난 할머니에게, 내가 죽을 때쯤엔 나도 할머니처럼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어요. 할머니는 마치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앞으로 몸을 숙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어떤 파이인지 알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단다.' " (35-36 페이지)
나는 나의 파이를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 파이를 발견해 기뻐했던 나를 기억한다. 하지만 내 파이가 어떤 것이었는지 자주 잊는다. 나의 파이대로 살려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다가 그 계획이 너무나 커져 애초에 내 파이를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떤 파이였는지 기억하기 위해 책을 읽고 지난 일기를 본다. 성당에 가기도 한다. 성당은 내게 종교적인 곳이라기보다 고향 같은 곳이다. 어릴 적엔 부모님과 함께 갔고 청소년기에는 연주 봉사를 했다. 성인이 되고도 고민이 생길 때면 성당에 간다. 일주일에 한 번 조용한 곳에서 나를 돌아보며 초심으로 돌아간다. 좋은 학교와 좋은 성적, 좋은 직장을 갖고 싶다는 욕심을 내려두고 나의 파이를 들여다 본다. 파이를 발견한 후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면 나름 큰 변화가 있더라. 작은 점(선택)들이 모여 길이 만들어져있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커져버린 계획에 짓눌려있는 나를 보며 지금까지 잘 해왔다고 격려 해준다. 계획은 목적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한 수단임을 기억한다. 내 파이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으면서 다시 앞으로 나갈 힘을 얻는다.
이어지는 글
인생 수업 1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류시화 옮김
인생 수업 2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류시화 옮김
인생 수업 3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류시화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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