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9일 월요일 저녁 베를린
계기: <문득 전종환>을 보고 읽게 되었다. 전종환 씨 설명대로, 황현산 선생의 책은 짧은 글귀로 읽는 것보다 글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때 더 잘 음미할 수 있다. 천천히 마시며 음미하는 와인처럼 말이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취하게 되는). 글 한 편을 모두 읽었을 때 의미를 깊게 느낄 수 있달까? 하지만 글을 모두 옮겨올 수 없으니 책의 작은 조각을 인용해본다.
ps. 좋은 책을 소개해주신 전종환 씨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당신의 사소한 사정
밥하기보다 쉬운 글쓰기. 이 야릇한 말은 최근에 전영주 시인이 발간한 책의 제목이다. [...] 오랫동안 글을 써왔고 그와 관계된 일을 직업으로 삼았으니 초보자라고 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내가 왜 그 일을 하는지, 새삼스럽게 묻게 된다.
저자는 당신이 잘 아는 것, 사소한 것, 당신의 실패와 변화에 대해 쓰라고 말한다. 사소한 것과 우리가 잘 아는 것은 사실 같은 것이다. 일상에 묻혀 살아온 사람이 거창한 지식을 갖기는 어렵다. 까다롭고 복잡한 이론체계에 친숙해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 한 주부가 여성주의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자기 친정이 어떻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구별하여 키웠는지는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인간의 심성이니 무의식이니 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공부한 적은 없지만 사흘 동안 입을 다물고 있는 남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 이 모든 것들은 다 사소한 것들이다. 사소하다는 것은 세상의 큰 목소리들과 엄밀한 이론체계들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감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은 바로 그 때문에 독창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실패와 변화도 이 사소한 것들과 세상의 거창한 이론들이 맺게 되는 관계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실패한다. 우리가 배웠던 것, 세상의 큰 목소리들이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들과 우리의 사소한 경험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고 엇나갈 때 우리는 실패한다. 우리들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저 큰 목소리들 앞아세는 항상 '당신의 사정'이다. [...]
그런데 우리는 그 실패의 순간마다 변화한다. 사람들마다 하나씩 안고 있는 이 사소한 당신의 사정들이 실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치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 그 변화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있다. [...]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당신이 쓰고 있는 글에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한다. 자신감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사소한 경험을 이 세상에 알려야 할 중요한 지식으로 여긴다는 것이며, 자신의 사소한 변화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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