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0일 토요일 저녁
(22:00-00:20)
오늘은 토요일이다. 주말은 순례길을 걷는 날이다. 산책을 하러 갔다가 순례길을 걷고 왔다.
베를린에서 시작하는 순례길을 짧게 소개해본다. 2020년 7월 나는 학업에서 실패를 경험했다. 혼자 시무룩하게 집에 있고 싶지 않아서 걷기 시작했다. 항상 다시 가보고 싶었던 순례길을 집 앞에서 시작했다. 5개월 동안 주말마다 걸었다. 주중에는 학교 수업을 듣고 과제를 했다. 주말 아침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그 전날 혹은 전주에 도착한 도시에서 순례길을 시작했다. 하루에 5-20km 걷고 싶은 만큼 걸었다. 11월이 되자 날이 추워져 순례길을 이틀에서 하루로 줄였다. 11월 말에는 시작 도시가 너무 멀어졌다. 도착 도시까지 2-3시간이 걸렸다. 집에서 출발하는 것은 무리였다. 순례길을 잠시 쉬기로 했다. 베를린에서 순례길을 걷다 지나친 장소를 가며 나만의 순례길을 걷기로 했다.
11월에 베를린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사했다. 베를린 순례길을 시작할 때는 베를린 남쪽에서 시작했다. 이사 온 집 내가 순례길을 시작할 때 살던 동네까지 걸을 수 있겠더라. 다시 나의 순례길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베를린 도심을 걸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이 있는 Unter den Linden 거리를 지나는 순례길이었다. 산책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친구들을 위해 사진을 찍었다. 나는 친구들과 '망아지 프로젝트'라는 산책 모임을 하고 있다. 친구 J는 매일 산책을 한 시간 이상 해야 해서 별명이 '망아지'다. J를 중심으로 산책과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여 이틀 전에 '망아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내가 좋아하는 서점 Dussmann을 발견했다. 오늘 순례길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다시 오기로 마음 먹었다. 순례길을 계속 걷다 보니 오른쪽 저 멀리 브란덴부르크 문이 보였다. 길을 그냥 갈까, 오른쪽으로 꺾어서 브란덴부르크 문에 가까이 가볼까 고민했다.
"급할 거 없잖아? 걷는데 의미가 있는 거지."
순례길은 더 이상 내게 '언제까지 어디에 도착해야한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2020년 7월 실패했을 때 그냥 걷고 싶었다. 순례길에 있고 싶었다. 나는 길을 걸었고 지금도 길 위에 있다. 순례길이 일상으로 들어오는 경험도 하고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 가까이 가보았다. 토요일 저녁 텅 빈 브란텐부르크 문이 생경했다. 오늘 아침 친구들과 한 대화가 떠올랐다. 명예욕과 권력욕에 대한 대화였다. 나는 명예욕이 있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주면 기분이 좋다. 공부해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좋겠고 이왕이면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지면 좋겠다. 그 일자리가 명예욕인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하는 일이 꼭 명예가 있어야 하는 일인가 자문한다. 나는 과테말라에서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오케스트라에서 함께 연주할 때 행복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삶이 내게 맞다.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산책하고 요리하고 소중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좋다. 오늘 아침까지는 이 두 가지가 상반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순례길을 걸으며 두 가지를 함께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향하며 30년 후 나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나에게 꼭 맞는 일이 하나 떠올랐다. 내가 하는 공부, 경험이 모여서 그 일을 하면 되겠구나.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겠구나. (무슨 일인지는 30년 후에 적도록 하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점에 들렀다. 두스만 Dussmann은 베를린에서 내가 애정하는 서점 중 하나다. 서점에 들어가면 폭포 느낌이 든다. 가운데가 뻥 뚫려있는 구조다. 책 폭포수 같다.
<1982년생 김지영>이 베스트셀러 3위에 있었다. 미소가 지어졌다. 4월 7일 독일어 독서모임에서 <1982년생 김지영>을 읽는다는 게 떠올라 책을 사기로 했다. 아직 한국어와 영화로도 보지 못한 책이다. 독일어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서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를 발견했다. 싯다르타 옆에 있는 다른 헤르만 헤세 <Glück>도 펼쳐보았다. 글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싯다르타>를 읽고 나니 헤르만 헤세 문체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사회학 이론 수업에서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소논문을 쓰고 나니, 막스 베버의 글이 어렵지 않게 느껴졌던 것과 비슷했다. 카프카 <Betrachtung> 책도 옆에 있었다. 책이 얇고 글씨는 컸다.
오! 읽어볼만 하겠군.
옆 책장도 구경했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여유를 가지고 볼 수 있었다. 시집을 하나 발견했다. 1920년대에 태어난 오스트리아 시인의 시집이었다. 일상 언어로 쓰인 아름다운 시였다. 시는 처음 볼 때 이해가 잘 안 되기도 하지만 계속 읽다 보면 이해가 된다. 아침마다 읽는 독일어 기도문이 시처럼 쓰여졌다. 몇몇 기도문은 처음에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매일 아침 낭독하다 보니 어느 순간
아! 이런 뜻이었구나!
이해되더라. 오늘 산 시집도 그럴 것이다. 곁에 두고 자주 읽어야지. 시집을 읽으니 갑자기 (시상이라고 하긴 쑥스러운) 문장들이 떠올라 핸드폰 앱에 메모를 남겼다. 내가 요즘 느끼는 감정이었다. 독일어로 시 쓰는 날이 올까?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베를린에서 시작하는 순례길을 걸으며 느낀 것
베를린 생활 초반에 다짐했던 '여행자로 살기'를 잘 지키고 있다. 순례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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