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순례길 :: 또 다시 실패할 나에게 - 9개월 전 편지

2021. 4. 30. 04:37일상 Alltag/베를린 순례길 Berliner Jakobsweg

2021년 4월 29일 목요일

순례길 걸은 시간: 11-17시

 

 

오늘 베를린 순례길을 걸었다. 아침 루틴을 할 때 순례길에 가야할 것 같았다. 마침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어머니와 통화하고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배낭 없이 가볍게 나왔다. 열쇠, 마스크, 핸드폰, 장갑, 모자, 목도리, 작은 우산만 챙겼다. 작년 11월에 이사 온 집에서 작년 7월에 시작한 순례길 시작점까지 걸었다. 9개월 전의 나를 만났다. 실패에 마음 아파 그 길을 시작했던 9개월 전의 내가.

 

순례길을 걸으며 내가 그동안 순례길에서 남긴 음성 메모를 들었다. 그중 하나가 '또다시 실패할 나에게'였다. 9개월 전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쓰는 편지였다. 오늘의 나에게. 9개월 전 나는 실패에 마음이 너무 쓰라렸다. 순례길 3일 차, 실패가 실패는 아니라는 걸 알고 나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미래에 또 실패할 나에게. 내 인생에서 '성장'은 중요한 가치다. 그래서 실패도 자주한다. 다시 또 내가 실망하지 않도록 응원하고 싶었다.

 

 

 

 

 

 

순례길을 가며 지난 공원

9개월 전 베를린 순례길을 시작한 이유는 학업에서의 실패였다. 내가 독일에 온 목적은 학업이다. 비자에 그렇게 쓰여있다. 하지만 나는 독일에 삶을 살기 위해 왔다. 이곳에서 계속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학교 다니는 동안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산다는 의미다. 코로나 전의 나의 일상을 소개해본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 씻고 산책을 간다.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는다. 주말에는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간다. 일요일에는 악기박물관에서 조교로 일한다. 독일에서의 삶은 공부 말고도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공부만 해서는 길고 긴 학업을 효율적으로 할 수 없다. 그래서 독일에 삶을 살러 왔다고 표현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유학 생활은 학업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시험 하나 떨어지면 졸업은 할 수 있을까 걱정한다. 논문 진행이 잘 안 되면 상심한다. 교수님 면담 분위기에 며칠 기분이 좌지우지된다. 9개월 전 나에게 너무나 큰 실패로 느껴지는 일이 있었다. 그동안 독일에서 한 노력이 모두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았다. 단지 다음 계단에 올라가지 못 했을 뿐이었다. 나는 목표한 계단에 올라가지 못하면 밑으로 쭉 미끄러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겨우 한 계단 내려왔을 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온 계단은 결코 미끄럼틀이 아니었다. 다시 숨을 고르고 준비해서 한 칸만 올라가면 됐다.

 

 

 

 

 

 

9개월 전, 2020년 7월 19일 베를린 순례길을 시작했던 장소에 오늘 도착했다. 그때 감정이 떠올랐다. 나 많이 상심했었지. 버스 사고 때문에 학업이 계획처럼 진행되지 않아 많이 실망했었지. 태어나 처음으로 몸이 아파서 무엇인가 할 수 없는 경험을 하며 많이 좌절했었지.

 

나는 내게 말했다.

'잘 했어. 9개월 동안 너 정말 성장했다. 그때 순례길 시작하길 정말 잘했어.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거 경험했네. 네가 열려고 하던 문이 열리지 않으면 더 좋은 문이 열린다고. 네가 상상하지 못한 문이 열렸고 그 문은 너를 더 넓은 세계로 데려다주었네.'

 

실제로 당시 내가 실패라고 여기던 일은 실패가 아니었다. 정확히 한 달 반 후에 나에게 다른 문이 열렸다. 열려고 했던 문보다 훨씬 더 좋은 문이었다. 그 문은 나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현재 나는 정말로 즐겁게 공부한다.

 

 

 

 

 

 

 

9개월 전 나는 오늘의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음성 녹음을 발췌하여 옮겨보았다.

 

"실패하고 울적할 나에게 Mauerradweg am Teltowkanal을 걷는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야. 

 

길은 말이야, 네가 오늘 걷는 이 길처럼 걷는 자체에 의미가 있어.

네가 오늘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걸으려고 했는데 안 되었다고 해서 그 길을 못 가는 건 아니야.

오늘 거기까지 안 가도 돼. 삶은 순례길과 비슷해.

5년 전에 나는 순례길 도착 도시 100 km 앞에서 출발했지만

5년 후 나는, 오늘의 나는 3000km 전에서 출발하잖아.

 

네가 원하는 거, 계획하는 거 얻지 못 했거나 잃었다고 해서 너무 낙심하지 마.

그런 일이 생겼을 때 다시 순례길에 오자.

네가 유럽에 있지 않고 다른 나라에 있다해도 길은 있을 거 아냐.

순례길로 향하는 서쪽으로 걸으면 돼.

 

예를 들어 네가 부산에서 실패를 했다면 국토대장정 (웃음: 내가 생각해도 좀 웃긴가 봄) 길을 걸어서 서울로 향하면 돼. 스페인 순례길로 향하는 길이니까. 네가 제주도에 있다면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 돼.

 

너는 정말로 특별한 아이야. 남들과 비교해서 특별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라 특별한 사람이야. 너라는 이유만으로 사랑받는 사람이야. 너는 지금까지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잖아. 부모님, 괴팅엔 부모님, 고모님, 이모할머니의 사랑.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받은 사랑, 선생님께 받은 사랑, 같이 사는 친구들에게 받은 사랑 등. 앞으로도 너는 사랑을 많이 받는 삶을 살 거야.

 

네가 한 번 실패한다고 해서 

한 고비가 있었을 때 그것을 넘지 못 했다고 해서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어. 

실망하겠지. 실망하지. 들인 노력이 얼만데. 너는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고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부었을 거야.

당연히 실망하지. 낙심하지.

그래, 일단 낙심하자. 하루 이틀 낙심하고 바로 순례길로 오자. 

실망하자마자 바로 와도 돼. 길에서 실망해도 되니까. 

 

이번에는 실패하고 이틀 만에 순례길에 왔잖아. 다음번에는 실패하자마자 바로 순례길을 시작하자.

어디서든 시작해도 돼. 네 집 앞에서든 어디서든! 어디서든 서쪽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면 돼."

(2020년 7월 26일)

 

 

음성 녹음도 올려보려고 공들여 편집했는데 편집본이 저장 안 됐다... 언젠간 음성 녹음으로도 들을 수 있길!

 

 

 

 

 

 

 

어어지는 글 - 9개월 전 베를린 순례길을 시작한 날

 

베를린에서 시작하는 스페인 순례길 1 - 작은 실패를 기념하며

2020년 7월 19일 일요일 베를린 삶에는 작은 성공 뿐 아니라 작은 실패도 많다. 작은 성공은 모여 큰 성공이 되고, 작은 실패도 모여 큰 성공이 된다. 이틀 전 작은 실패를 했다. 몇 달 전에도 비슷

domi7.tistory.com

 

 

더보기

Hier werden zwei Links eingefügt, die ich beim Schreiben gehört habe.

5년 전 처음 순례길을 걸었던 이유는 이별 때문이었다. 베를린 순례길은 첫 순례길을 다녀오고 5년 후에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두 가지를 위해 걸었다. 하나의 선택과 아쉬웠던 일. 얼마 전 내가 경험한 일은 실패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아서 아쉬운 일이었다. 9개월 전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보내는 음성 편지를 들으니 힘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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