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7일 수요일 밤
오늘 저녁 웹엑스(Webex)에서 친구 G를 만났다. 웹엑스는 줌(Zoom)과 비슷한 화상 회의 프로그램이다. 오늘 우리는 스페인 순례길에 대해 말하기로 했다. 나는 아직 순례길을 가보지 않은 G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며 며칠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순례길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어 기뻤다.
첫 45분은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내가 장을 보느라 약속을 10분 늦추었기 때문에 G는 나에게 무엇을 샀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과일, 야채, 과자, 냉동 채소를 샀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디에서 장을 보는지, 가계부는 어떻게 쓰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적게 소유하는 삶, 독일과 한국에서 인기 있는 책 장르는 무엇인지, 괴테와 한국 소설가 이야기를 했다.
나의 순례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2015년 순례길부터 2020년 순례길까지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짧게 한다고 했는데도 30분이 훌쩍 넘게 혼자 말했다. 고맙게도 G는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2015년 순례길: 이별이 이별은 아니야
2015년 순례길의 깨달음은 이별이 이별은 아니라는 것이다. 2015년 나는 소논문에 떨어졌고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몇 달 뒤 순례길을 부모님과 함께 걸었다.
남자 친구와의 이별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순례길을 마치고 보니 이별이 이별은 아니더라. 우리는 서로가 필요한 시기에 함께 걸었고 (연인 관계로 만났고), 이제는 서로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내 마음 속에 있고 그의 마음에도 있으니 이별은 아니었다.
우리가 함께이던 시절 그가 말했다.
'우리가 이별해도 너는 내 마음 한 공간에 영원히 존재할 거야.'
처음 그의 말을 들었었 때 나는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는 영원히 내 마음속 작은 방에 존재한다는 걸. 그와 함께했던 시간의 나도 그곳에 존재한다. 그를 만나며 나라는 사람을 깊이 알게 되었다. 함께 하는 삶을 배웠고 세상을 살아가는 법도 배웠다. 그래서 그와 함께한 시간은 내게 아주 소중하다. 이별 덕분에 순례길을 걸었으니 그에게 참 고맙다.
2020년 순례길: 실패가 실패는 아니야
2020년 7월 나는 학업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실패하고 몸을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며칠간 혹은 몇 주간 실망감에 가득차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기력하게 있지 않기 위해 밭을 일구는 신체 노동을 하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밭이 없었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고 코로나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도 없었다. 문득 순례길이 떠올랐다.
'우리 집 앞에서 시작하자.'
아침 산책하는 듯 길을 떠났다. 조깅 바지, 티셔츠, 복숭아 몇 알 챙겨 들고 순례길을 시작했다. 베를린을 통과하는 순례길을 핸드폰 구글 지도에서 찾아보았다. 햇볕이 뜨거운 날이었다. 여름 향기가 싱그러운 날이었다. 우리 집 앞에서 순례길을 시작해 동네 서점을 지나 도시 외곽에 도착했다. 베를린을 통과하는 순례길이 있는 곳이었다.그곳에 도착했을 때 커다란 플래카드가 있었다. 2,963km를 가면 스페인 순례길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에 도착한다고 쓰여있었다.
'그래! 2,963km 걸어보자. 몇 년에 걸쳐서 걷자. 나에게는 시간이 많잖아!'
순례길을 걸으며 몇 번이나 길을 잃었다. 나는 원래 길을 잘 잃는다. 하지만 문제 될 게 없었다. 나에게는 도착할 곳도, 도착해야 하는 시간도 없었다. 걷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2020년 길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실패가 실패는 아니라는 것이다. 순례길을 걸으며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수많은 실패가 떠올랐다. 안 했으면 했던 선택을 떠올랐다. 하지만 그 선택 덕분에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만났다. 실패 덕분에 순례길을 걷게 되었다. 그 순간 실패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실패가 아니었다. 내가 두드렸던 문이 안 열렸을 뿐이었다. 열리지 않았던 문 대신 내가 보지 못한 문이 내 앞에 왔고 그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그 문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만났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건강하게 자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살아 있어 도전할 수 있었다. 도전이 실패로 끝났지만 나는 다시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패가 아니라 그 이후에 무엇을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것에 따라 과거의 실패가 더는 실패가 아닐 수 있다.
5개월 동안 주말마다 걸었고 100km 가까이 걸었다.
G에게 고맙다. 나는 오늘 순례길 이야기를 하면서 그 시간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순례자라는 나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은 겨울이라 순례길을 쉬고 있다. 순례길 대신 걸어서 갈 수 있는 베를린 이곳 저곳을 탐험중이다.
4일 후 G가 사진을 보내왔다. G는 독일 남부에 사는데 주말에 산책하다 순례길 표식을 발견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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