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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Alltag/베를린 순례길 Berliner Jakobsweg

새벽 일기 - 베를린에서 시작하는 순례길 15일 차, 넷플릭스 <래처드>

by 통로- 2020. 9. 19.

2020년 9월 19일 토요일, 순례길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되는 날. 새벽 4시 30분 베를린 P  

 

 

글을 쓸 수 있어 좋다. 글을 즐겨 쓴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어떤 생각이 들 때 글로 써보는 상상을 한다.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볼까, 어떤 구조로 써볼까 등. 메모 앱 짧게 기록하기도 하고, 기록할 잠시의 시간도 없을 때는 음성메모 앱에 녹음한다. 베를린에서 시작하는 순례길에서 기록한 생생한 음성 녹음이 핸드폰에 쌓여간다. 어서 기록을 해야 하는데!!

 

베를린에서 시작하는 순례길을 걸은 지 두 달이 되었다. 벌써 15일이나 걸었다(주말마다 걷고 있다). 5년 전 부모님과 걸었던 110km 순례길에 5일이 걸렸다. 5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정말 많은 경험을 했다. 그 시간은 모두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매일의 모험(새벽에 일어나 걷고 오후에 목표한 마을에 도착해 식사하러 가는 모험)을 글로 기록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울 정도였다. 일기 쓸 겨를이 없었다.

 

5년 후인 2020년, 그러니까 두 달 전 베를린에서 시작한 순례길 6일째가 되었을 때, 왜 내가 5년 전 매일 일기를 못 썼는지 알겠더라. 매일 20km 이상을 걷는 게 체력적으로도 힘들었을(처음 신는 등산화 때문에 발에 물집이 생겼다) 뿐 아니라 오후에는 식당을 찾아가는 모험(나는 스페인어를 거의 못했는데 스페인어 통역 담당이었다. 아빠는 순례길 가이드, 엄마는 사진사. 부모님의 취향이 확고하여 음식을 시키는데 수준 높은 스페인어가 필요했다), 부모님과 함께 저녁 미사 가기. 매일 빡빡한 일정이었다. 빡빡했던 만큼 그 순간이 모두 추억이 되었다. 5년이나 지났는데도 생생하다. 

 

혼자 걷는 순례길도 매일 기록하기 어렵더라. 늦은 오후에 새로운 마을에 도착하면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고 베를린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도착하면 너무 배가 고프다. 밥을 먹고 나면 졸리다. 땀을 많이 흘렀으니 샤워도 해야 하고. 이렇게 걷고 먹고 씻기만 하는데 하루가 다 간다. 

 

글로 쓰면 몇 문장 안 되는 단순한 하루다. 하지만 순례길을 걷는 순간순간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자연의 경이로움, 5년 전 부모님과 함께 걸었던 순례길,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는 확신, 순례길은 참으로 나다운 여행이라는 것, 건강한 몸에 대한 고마움 등.

 

글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다. 4시 36분에 시작했고 지금은 5시 8분.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여기서 마친다.  

 

 

 


 

 

쓰고 싶었던 이야기:

지도 - 라이프치히까지 1/2

나호코 잠깐 만나기 혹은

코로나 때문에 어렵다면 나호코 집에 편지 한 장을 넣고 오기

 

어제 본 넷플릭스 드라마 <래처드>가 미친 영향.

내가 범죄물을 못 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겁 많은 편. <래처드> 괜히 봤음).

하지만 <래처드>는 너무나 흡입력이 강하더라.

영상미도 좋고! 박찬욱 감독 <아가씨>처럼.

영상이 너무 예쁘고 전개가 빨라서 자꾸 보게 됨.

무서운 장면에서 깜짝깜짝 놀라면서도 시즌 1 끝까지 다 봤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가위눌림.

뇌과학 책이 떠오름. 색깔 명상도.

<해인글방>을 보고 블로그에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 

 

스페인 순례길 2015, 2000 대한 글 계획:

다섯 가지 키워드로 쓰고 싶다. 첫 번째는 '사랑'이다. 

2020년 스페인 순례길에서 깨달았다.

2015년 스페인 순례길은 사랑(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별. 이별도 사랑에 포함되니까!)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마무리되었고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

 

일상과 순례길이 겹치는 특별한 경험:

순례길 끝나고 화장지 사서 집에 가기

Potsdamer Platz 역에서 Teltow Stadt 행 S-Bahn 발견. '나 저기 가봤다!'

 

베를린에서 시작하는 순례길을 걸으며 매일 일기는 쓰지 못했지만

순간순간 음성 녹음을 남겨 다행이다.

순례길 글을 쓸 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오후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키 작은 갈대처럼 보이는 식물이 예뻐서 찍었다. 봉준호 감독 마더 첫 장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