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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Alltag/시와 글과 영화와 책 Bücher

헬렌 켈러 -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박에스더 옮김)

by 통로- 2019. 5. 24.

2019년 5월 23일 수요일 베를린

 

헬렌 켈러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박에스더 옮김, 도서출판 사우)

 

학교 전자도서관(알라딘)에서 새로 나온 책 목록을 보다가 발견했다. 어릴 적 헬렌 켈러에 관한 책을 읽으며 설리반 선생님이 헬렌 켈러의 손에 글씨를 써주던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헬렌 켈러가 쓴 글은 처음 읽어보았다.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번역가 박에스더 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어느 날엔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대체로 그날이 먼 미래에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건강할 때 죽음을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드뭅니다. 하루는 끝없는 풍경으로 뻗어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일들을 하고, 삶을 대하는 우리 자신의 무관심한 태도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우리의 능력과 감각을 사용하는 데도 그러한 무감각이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걱정이 됩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만이 청각의 가치를 알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만이 시각에 담긴 다채로운 축복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각이나 청각이 손상되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축복받은 능력을 잘 활용하지 못합니다. 눈과 귀는 집중하지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하면서 모든 풍경과 소리를 흐릿하게 받아들입니다. 무엇이든 잃어버리기 전에는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는, 아프기 전에는 건강의 중요함을 알지 못한다는 흔한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성년기 초반에 며칠 정도 눈이 멀거나 귀가 머는 경험을 하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둠은 시각의 소중함을, 정적은 소리를 듣는 즐거움을 일깨워줄 것입니다.

 

때때로 나는 두 눈이 멀쩡한 친구들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묻곤 합니다. 최근에도 친한 친구 하나가 숲속으로 긴 산책을 갔다가 나를 찾아왔기에 무엇을 보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특별한 것은 없었어"라는 답을 들었지요. 그녀의 말을 쉬이 받아들인 것은 내가 이미 그러한 반응에 익숙하며, 이미 오래전부터 눈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 아주 적은 것을 볼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이나 숲 속을 걷고서도 특별히 관심 가질 것을 찾지 못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보지 못하는 나는 그저 만지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것을 수백 가지나 찾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나는 나뭇잎의 섬세한 균형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껍질이나 소나무의 거친 껍질을 쓰다듬습니다. 봄이 오면 겨울잠을 마친 자연이 깨어남을 알리는 첫 신호인 새싹을 찾으리라는 기대로 나뭇가지를 만집니다. 나는 감미롭게 부드러운 꽃의 질감을 느끼고 나선형 구조를 발견하고는 놀랍니다. 자연의 기적을 알아차린 것만 같습니다. 아주 운이 좋을 때는 작은 나무 위에 부드럽게 손을 얹고 노래하는 새의 기쁜 떨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힘차게 흘러가는 개울의 차가운 물도 나를 기쁘게 합니다. [...]

 

가끔은 이 모든 것들을 직접 보고 싶다는 갈망으로 가슴이 터질듯합니다. 만지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즐거운데 직접 본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그러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 적게 보는 듯합니다. 온갖 색채와 율동으로 가득한 세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가진 것을 감사히 여기기보다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하는 모습이 어쩌면 인간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빛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시각'이라는 재능이 삶을 충만하게 해주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편의를 위해서나 이용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내가 대학의 학장이라면, "눈을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필수 과목을 개설하겠습니다. 선생은 학생들이 이전까지는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치던 것들을 제대로 보고, 삶에 즐거움을 더하는 방법을 보여주고자 하겠지요. 학생들은 잠들어 있는 무딤 감각을 깨우고자 할 것입니다. 

내가 만약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무엇을 가장 보고 싶은가 상상해봅니다. 내가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동안 당신도 앞으로 단 사흘만 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함께 고민해볼수 있을 겁니다. 셋째 날 어둠이 내릴 때, 이제 다시는 빛이 비추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면 이 소중한 사흘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당신이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헬렌 켈러, 사흘만 볼 수 있다면 480/521 옮긴이:박에스더)


 

 

라디오를 듣다 발견한 Christian Sinding의  Frühlingsrauschen. 켈러가 표현한 ' 봄이 오면 겨울잠을 마친 자연이 깨어남을 알리는 첫 신호인 새싹'이 보이는 듯하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Three Days to See'는 헬렌 컬러가 53세에 쓴 수필로, 1933년 <애틀랜틱 먼슬리> 1월호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애틀랜틱 먼슬리> 홈페이지에서 영문 원본을 찾았다. 

 

Most of us, however, take life for granted. We know that one day we must die, but usually we picture that day as far in the future. When we are in buoyant health, death is all but unimaginable. We seldom think of it. The days stretch out in an endless vista. So we go about our petty tasks, hardly aware of our listless attitude toward life.

The same lethargy, I am afraid, characterizes the use of all our faculties and senses. Only the deaf appreciate hearing, only the blind realize the manifold blessings that lie in sight. Particularly does this observation apply to those who have lost sight and hearing in adult life. But those who have never suffered impairment of sight or hearing seldom make the fullest use of these blessed faculties. Their eyes and ears take in all sights and sounds hazily, without concentration and with little appreciation. It is the same old story of not being grateful for what we have until we lose it, of not being conscious of health until we are ill.

I have often thought it would be a blessing if each human being were stricken blind and deaf for a few days at some time during his early adult life. Darkness would make him more appreciative of sight; silence would teach him the joys of sound.

Now and then I have tested my seeing friends to discover what they see. Recently I was visited by a very good friend who had just returned from a long walk in the woods, and I asked her what she had observed. "Nothing in particular," she replied. I might have been incredulous had I not been accustomed to such responses, for long ago I became convinced that the seeing see little.

How was it possible, I asked myself, to walk for an hour through the woods and see nothing worthy of note? I who cannot see find hundreds of things to interest me through mere touch. I feel the delicate symmetry of a leaf. I pass my hands lovingly about the smooth skin of a silver birch, or the rough, shaggy bark of a pine. In spring I touch the branches of trees hopefully in search of a bud, the first sign of awakening Nature after her winter's sleep. I feel the delightful, velvety texture of a flower, and discover its remarkable convolutions; and something of the miracle of Nature is revealed to me. Occasionally, if I am very fortunate, I place my hand gently on a small tree and feel the happy quiver of a bird in full song. I am delighted to have the cool waters of a brook rush through my open fingers. To me a lush carpet of pine needles or spongy grass is more welcome than the most luxurious Persian rug. To me the pageant of seasons is a thrilling and unending drama, the action of which streams through my finger tips.

At times my heart cries out with longing to see all these things. If I can get so much pleasure from mere touch, how much more beauty must be revealed by sight. Yet, those who have eyes apparently see little. The panorama of color and action which fills the world is taken for granted. It is human, perhaps, to appreciate little that which we have and to long for that which we have not, but it is a great pity that in the world of light the gift of sight is used only as a mere convenience rather than as a means of adding fullness to life.

If I were the president of a university I should establish a compulsory course in "How to Use Your Eyes." The professor would try to show his pupils how they could add joy to their lives by really seeing what passes unnoticed before them. He would try to awake their dormant and sluggish faculties.

II
Perhaps I can best illustrate by imagining what I should most like to see if I were given the use of my eyes, say, for just three days. And while I am imagining, suppose you, too, set your mind to work on the problem of how you would use your own eyes if you had only three more days to see. If with the oncoming darkness of the third night you knew that the sun would never rise for you again, how would you spend those three precious intervening days? What would you most want to let your gaze rest upon?


Copyright © 1997 by Helen Keller. All rights reserved. 
The Atlantic Monthly; January 1933; Three Days to See; Volume 151, No. 1; pages 35-42. 

https://www.theatlantic.com/past/docs/issues/33jan/keller.htm

 

 

 

1925년 헬렌 켈러의 연설

 

 

 

HELEN KELLER SPEAKS OUT

 

 

 

읽은 후 다짐: 어둠 속의 식사를 해보기로 했다. 검색해보니 베를린에 식당이 하나 있다. 조금 비싼 곳이라 버킷리스트에 넣어두고 기회가 되면 가봐야겠다. https://www.berlin-welcomecard.de/en/partner/nocti-vagus-dark-restaurant-dark-stage

 

어둠 속의 식사(런던)에 관한 기사

 

이 식당의 손님들은 기꺼이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더듬거리며 와인잔을 넘어뜨릴 뻔한 끝에야 내가 찾던 빵을 찾아냈다. 빵으로 접시의 소스를 닦으며, 나는 이게 옆 사람 접시가 아닌 내 접시이길 빌었다.이건 레스토랑 '당 르 느와(Dnas Le Noir)'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다. 이 레스토랑에서 손님들은 어둠 속에서 시각장애인 웨이터들이 서빙한 음식을 먹는다.당르느와는 프랑스어로 ‘어둠 속에서’라는...

www.huffingtonpost.kr

 

 


 

 

 

엄마의 사진

 

 

 

 

아빠의 사진

 

 


 

 

 

부엌 창문을 내다보면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름이 궁금했다. 

 

 

 

도리 언니와 람이에게 선물 받은 나무 카드를 살펴보았다. Bergahorn과 Waldahorn 두 나무가 가장 비슷하게 생겼더라. 나뭇잎 모양을 잘 살펴보니 Bergahorn인 것 같아 나무 이름과 설명이 적힌 카드를 부엌 창문에 붙여두었다. 

 

 

 

우리집 수국은 잘 자라고 있다. 벌써 세 번째 꽃대에 꽃이 활짝 피었다. 세 달 전 처음 사왔을 땐 잘 보이지도 않던 꽃대였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