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생활을 하다 넘어질 때 안전망이 있다면 - 사회∙정서적 관계 안전망

2019. 1. 19. 07:16독일 대학과 새로운 학문 Uni/외국인 학생 생존기 Studieren

유학 오면 단순히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공부 말고도 넘어야 하는 산이 많다. 집 구해야지, 서류 완벽하게 준비해서 비자받아야지, 1-2년마다 또 서류 완벽하게 준비해서 비자 연장해야지, 건강도 챙겨야 하지, 졸업 후 취업 위해 인턴 해야지, 아르바이트도 해야지.


한국에서는 독립해서 산다고 해도 집 계약이나 이사할 때 부모님이 도와주셨다. 가끔씩 보내주시는 엄마 반찬으로 식비 절약에 건강도 챙길 수 있었다. 마음이 허하고 쉬고 싶을 때엔 밥 나오고 빨래 서비스되는 부모님 집에서 며칠 지내고 왔다.


독일에는 반찬 만들어주는 엄마도 안 계시고, 부동산 가서 집 계약해주는 아빠도 안 계신다. 조식과 빨래 서비스되는 부모님 호텔(부모님 집)도 없다. 내 건강은 내가 챙겨야 하고 내 집은 내 발로 뛰어 구해야 한다.



부모님과 오래된 친구들이 없는 유학생활에서는, 넘어졌을 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무릎 탈탈 털고 일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서 '도움'의 의미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 놓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밥 한 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유학 생활에서 내게 어떤 안전망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니 


학업 안전망 - 공부가 어려울 때 도움받을 수 있는 곳이나 사람 

스스로 안전망 - 넘어졌을 때 스스로 무릎을 털고 일어나는 방법 

사회∙정서적 관계 안전망 - 정서적으로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 

금전적 안전망 - 공부하면서 아르바이트하기, (받고 싶은) 장학금


이렇게 네 가지 안전망이 떠올랐다. 오늘은 사회∙정서적 관계 안전망에 대해 써보겠다. 안정망을 만드려고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지나고 보니 나의 안전망이 되어 있었던 사람들을 소개해본다.







사회∙정서적 관계 안전망이라 쓰는 이유는, 독일어 '사회적 안전망 das soziale Sicherheitsnetz'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Das soziales Sicherheitsnetz는 국가가 실업, 질병, 노령, 빈곤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는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뜻도 있지만, 관계 속에서 정서적 지지를 얻는 안전망(Ein soziales Sicherheitsnetz knüpfen)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래서 '사회∙정서적 관계 안전망'이라 이름을 붙여보았다.




사회∙정서적 관계 안전망



랑엔펠트 고모님: 고모님은 70년대에 간호사로 독일에 오셨다. 나의 진짜 고모는 아니고, 엄마 아는 분의 아는 분 소개로 네 다리나 걸쳐 만나게 된 분이다. 가끔 외국인으로서의 삶이 지칠 때 고모님과 통화를 한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고모님은 이미 지나왔기 때문에 내 마음을 잘 이해해주신다. 또 고모님 특유의 유쾌함으로 전화를 끝낼 즈음에는 나도 모르게 웃고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고모님 댁에서 맛있는 한국 음식도 먹고 왔다.


독일 가족: 폴렛 엄마의 집밥 찬스를 얻었다. 독일 괴팅엔(Göttingen)에서 학부를 시작했을 때, 외국인 학생과 독일 가정을 이어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 가족을 만났다. 괴팅엔 부모님 댁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즐겁게 이야기하다 보면 마음도 따뜻해진다. 아르바이트 상사와 문제가 생겼을 때엔 독일 아빠와 상담을 했다. 독일 아빠는 독일 문화를 고려하여 상사와의 면담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알려주셨다. 괴팅엔 가족을 통해 만난 이란 언니 파테메와는 베를린에서도 종종 만나며 언니-동생으로 잘 지내고 있다.


한국 친구: 한국사람으로서 겪는 어려움을 가장 잘 공감해줄 수 있는 친구는 역시 한국 친구다. 괴팅엔에서 첫 학기를 시작했을 때 어려움이 많았다. 수업에서는 독일어 때문에 알아듣는 것이 별로 없었고, 매일 저녁 집을 보러 다니느라 지쳐있었다. 같이 수업을 듣는 독일 학생들은 무뚝뚝해서 친구를 만드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졌다. '친구 없이 학교를 다녀야 하나' 시무룩해하던 내게 한국 친구가 해주었던 이야기. '스스로 벽을 만들지 마. 너만의 특별함을 알아줄 친구가 생길 거야.' 나보다 몇 년 더 일찍 공부를 시작한 한국인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음이 풀렸다. 비자 때문에 고민이었을 때는, 같은 시기에 독일에 온 한국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또 한국 요리를 잘하는 친구에게는 맛있는 김치도 얻어먹었다.


독일 친구: 처음에는 그렇게 무뚝뚝하더니 한 번 마음을 열면 가족 같이 지내게 되는 친구가 독일 사람이더라. 아파서 수업에 못 오면 필기를 먼저 보여주고, 소논문을 쓰며 고생하고 있으면 '내가 한 번 봐줄까?' 물어본다. 친구에게 갔다 온 소논문에는 빨간 표시(수정할 것)가 가득해 좀 민망했지만 꼼꼼하게 봐준 친구에게 참 고마웠다. 내가 남자 친구와 헤어졌을 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 남자 친구 욕을 해주던 친구도 있었다.


외국인 친구: 독일에 처음 와서 1년 동안 어학원을 다녔다. 매일 4시간씩 수업을 듣다 보니 중고등학교 친구처럼 친해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독일에 남아있는 몇몇 친구와는 아직까지도 연락을 하며 지낸다. 나와 같은 시기에 독일 생활을 시작해서 꼭 고향 친구 같다.




덧붙이는 이야기: 한 사람이 모든 부분의 정서적 지지를 줄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독일 친구는 내가 한국인으로서 독일에서 겪는 어려움을 잘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주려 노력하겠지만 완벽하게 공감할 수는 없다. 친구가 공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이런 문제는 한국인 친구나 외국인 친구랑 얘기하면 된다. 비자, 언어 때문에 학업의 어려움을 겪어 본 친구들과 이야기하면 가슴이 뻥 뚫린다. 누군가 공감을 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지고, 좋은 조언도 얻을 수도 있다. 넘어지고 일어나는 것이 일상이지만 안전망이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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