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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Alltag/하루하루가 모여 heute

볼 수 있다는 것 - 헬렌 켈러, 사흘만 볼 수 있다면

by 통로- 2022. 8. 25.

2022년 8월 21일 일요일 저녁 베를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성년기 초반에 며칠 정도 눈이 멀거나 귀가 머는 경험을 하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둠은 시각의 소중함을, 정적은 소리를 듣는 즐거움을 일깨워줄 것입니다." (헬렌 켈러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전자책 480/521, 옮긴이:박에스더)

 

새벽에 일어나 깜깜한 방과 복도를 지나 화장실에 갈 때 나는 헬렌 켈러가 제안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몇 초 정도 눈이 멀었다고 말이다.

 

3년 전 전자도서관에서 헬렌 켈러의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수필을 발견했다. 글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번역도 아름다웠다. 나는 책을 낭독했고 지금도 종종 녹음해 둔 낭독을 듣는다. 아침에 일어나기 귀찮을 때, 무엇인가 해야 하는데 괜히 하기 싫은 마음이 생길 때 듣는다. 낭독을 들으면 창밖 하늘과 나무를 보며 볼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본다는 것은 내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아침마다 눈을 떠서 햇살을 보고 텅 빈 방을 본다. 방문을 열고 나가 화장실에 간다. 방에 돌아와 컵에 물을 담아 마시며 창밖을 본다. 산책하러 나가 가로수를 보고 아침 일찍 운동 나온 사람들을 본다. 산책하는 즐거운 강아지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성당에서 미사 책을 보며 성가를 부르고 미사가 끝난 후에는 노트에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적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마트에 들러 싱싱한 과일과 야채를 고른다. 저녁에는 노을 지는 하늘을 본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노트북을 열어 마음에 와닿은 글귀를 정리한다. 방 한쪽에 있는 세면대에서 세수하고 이를 닦는다. 선풍기를 약하게 틀어두고 잠든다.

 

이 평범한 일상은 내가 볼 수 있기에 가능하다. 자연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어 대화하고, 좋아하는 책을 볼 수 있어 감사하다. 이제 저녁 산책하러 가야겠다. 산책하기 조금 귀찮지만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을 읽으니 산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보지 못하는 나는 그저 만지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것을 수백 가지나 찾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나는 나뭇잎의 섬세한 균형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껍질이나 소나무의 거친 껍질을 쓰다듬습니다. 봄이 오면 겨울잠을 마친 자연이 깨어남을 알리는 첫 신호인 새싹을 찾으리라는 기대로 나뭇가지를 만집니다. 나는 감미롭게 부드러운 꽃의 질감을 느끼고 나선형 구조를 발견하고는 놀랍니다. 자연의 기적을 알아차린 것만 같습니다. 아주 운이 좋을 때는 작은 나무 위에 부드럽게 손을 얹고 노래하는 새의 기쁜 떨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힘차게 흘러가는 개울의 차가운 물도 나를 기쁘게 합니다.

[...]  

가끔은 이 모든 것들을 직접 보고 싶다는 갈망으로 가슴이 터질듯합니다. 만지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즐거운데 직접 본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그러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 적게 보는 듯합니다. 온갖 색채와 율동으로 가득한 세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가진 것을 감사히 여기기보다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하는 모습이 어쩌면 인간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빛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시각'이라는 재능이 삶을 충만하게 해주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편의를 위해서나 이용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헬렌 켈러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전자책 480/521, 옮긴이:박에스더)

 

나도 시각이라는 재능을 삶을 충만하게 해주는 도구로 써보아야지. 산책하며 보는 것을 마치 처음 보듯 보아야겠다.

 

 


 

 

 

헬렌 켈러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수필 (한글과 영어)

 

헬렌 켈러 -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박에스더 옮김)

2019년 5월 23일 수요일 베를린 학교 전자도서관(알라딘)에서 새로 나온 책 목록을 보다가 발견했다. 어릴 적 헬렌 켈러에 관한 책을 읽으며 설리반 선생님이 헬렌 켈러의 손에 글씨를 써주던 장면

domi7.tistory.com

 

 

 

 

 

창밖 새벽 하늘

 

 

 

 

 

 

저녁 노을

 

 

 

 

 

저녁 산책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