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일
..... 그렇다. 함께 사는 건 사실 기적 같은 일이다. '함께 사는 기적'은 떼제 신한열 수사님 책 제목에서 따왔다. 신한열 수사님은 따뜻한 의미로 '기적'이라 표현하셨다. 내 글에서는 '함께 살기 쉽지 않다. 함께 사는 자체가 진짜 기적이다'는 의미로 썼다.
함께 살면서 즐거운 일만 있을 수는 없다. 가족과 함께 살 때도 친구들과 함께 살 때도 마찬가지다. 12월 31일이었던 어젯밤 11시 우리 다섯 명은 기숙사 부엌에서 다 같이 축하를 하기로 했다. 각자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서 말이다. E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몸만 왔다.
E가 좀 그렇다. 눈치도 없고 염치도 없고 청소도 안 하고 부엌도 지저분하게 쓰고. 지난주에는 E가 화장실 청소를 안 하더라. 여섯 명이 쓰는 플랫이라 화장실이 매우 빨리 지저분해진다.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청소해 주어야 하는데 E가 담당이었던 화장실은 일주일하고 이틀이 넘어가도록 그대로 더럽게 있었다. 얼마 전 기숙사 회의에서 화장실 청소할 때 샤워 부스 바닥을 매주 닦기로 했는데 그것도 안 닦여 있고. 사실 회의를 할 때 E를 뺀 나머지 하우스메이트가 E에게 청소에 대해 좋게 좋게 말할 때도 E는 알았다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아무 요리도 준비하지 않았으면서 11시 시간은 맞춰 온 E. 나는 '이제는 한 번쯤은 말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E는 좋게 좋게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니, 팩트만 정확히 간결하게 말했다.
나: 혹시 지난주 화장실 청소했니?
E: (조금 놀람.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다는 듯) 했는데?
나: 아 그랬구나. 그럼 다음부터는 지난번 기숙사 회의에서 말한 것처럼 샤워부스 바닥이랑 화장실 바닥도 청소해줄래?
E는 나의 질문에 기분이 상했나 보다. E는 내가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도 아니면서 그런 말을 한다고 꿍얼거렸다.
E에게는 청소에 관련된 또 다른 일화가 있다. 11월 말 기숙사에서 코로나 감염 확진이 된 사람이 E였다. 다행히 기숙사에 화장실이 두 개가 있어서 E는 작은 화장실을 2주간 썼다. E의 자가격리가 끝난 주에 J는 E에게 작은 화장실 청소를 해달라고 말했다. 자신이 코로나 확진이 되어 쓴 화장실은 자신이 청소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하지만 E는 자신이 화장실 담당이 아니라는 이유로 하지 않았다. 그 일로 J는 E에게 크게 실망했다며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E가 이해가지 않았다. 그래서 일기를 썼다. 글을 쓰다 보면 고민이 해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기 결론:
우리가 함께 사는 사이인 건 맞나 보다. 가족도 명절 때 만나면 말다툼을 하기 마련인데, 함께 사는 우리도 작은 문제로 기분이 상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플랫(WG)에서 사는 것은 나의 결정이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가장 큰 스트레스는 인간관계에서 받는다고 하지 않나. 나는 기숙사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과도 사는 연습'을 한다고 생각한다. 매우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나는 내가 해볼 수 있는 선에서 모든 것을 했다. E에게 정화하게 팩트를 말했다. E가 청소를 하는 것은 그의 몫이다. 나는 그를 바꿀 수 없다. 바꾸어서도 안 된다.
E가 태어난 나라와 사회 분위기를 떠올려보았다. 20대 초반에 독일로 온 E는 독립해서 산 경험이 없어서 청소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기숙사에는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서로 배려하며 지낸다.
E에게 고마운 점을 생각해보았다. 지난주 우리는 기숙사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선물 받았다. E는 M과 함께 크리스마스트리를 가지러 갔다. 또 무료 나눔 하는 선반을 가지러 가기도 했다. 내가 화장실 갈 때마다 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부엌에서 매일 쓰는 선반을 E 덕분에 쓰고 있으니 고마운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이제 E를 만나면 '크리스마스트리와 선반'을 바로 떠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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