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일 일요일 오후 베를린
신앙
신앙은 나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공기처럼 당연해서 잊고 살기도 한다. 미사를 빼먹는 날도 있다. 하지만 삶의 크고 작은 중요한 순간에 나는 항상 기도를 드린다. 크고 중요한 순간이란 고등학교 입시, 대학 입시, 독일어 시험, 논문이 있다. 작고 중요한 순간은 짝사랑하는 친구랑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 썸을 타는 친구와 사귀는 게 좋을지 여쭈어보는 기도가 있다.
일요일 12시 미사에 다녀왔다. 이번주 목요일은 성당 합창단 연습에 갔고 금요일 저녁에는 떼제 모임도 갔으니 미사는 가지 말까? 생각이 들었지만 가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시간은 고요한 곳에서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니 말이다. 논문 쓸 때 힘을 얻고 위안을 얻은 곳도 미사였다. 논문을 잘 끝냈으니 감사 인사 드리러 일요일마다 미사에 참석하기로 다짐한 터였다.
우리 동네 성당은 다른 독일 성당과 다르게 신자가 많다 (유럽은 신자가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미사에 늦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다. 나는 10분 늦게 도착했다. 자리가 없어 가장 뒤에 서서 미사를 드렸다. 제대가 바로 보이는 자리였다. 영성체 모시러 가는 길 친할머니 생각이 났다. 이 순간 이곳에 있는 것은 친할머니 덕분이다. 친할머니 덕분에 아빠가 이 세상에 왔고, 친할머니의 오빠인 외삼촌 할아버지 신부님 덕분에 아빠와 엄마가 만났기 때문이다.
아빠와 엄마의 첫 만남
아빠와 엄마는 사제관에서 처음 만났다. 두 신부님이 주선한 소개팅이었다. 아빠의 주선자는 친할머니 오빠인 외삼촌 할아버지 신부님였다. 엄마의 주선자는 미카엘 신부님이였다. 엄마는 수녀원 재단의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 졸업 후 그곳에서 선생님으로 일했다. 미카엘 신부님은 학교 담당 신부님이셨다. 친한 친구였던 미카엘 신부님과 외삼촌 할아버지 신부님은 결혼 적령기인 두 남녀를 소개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아빠는 그날이 소개팅인 줄 알았다고 했다. 엄마는 몰랐다. 신부님이 사제관으로 들르라 해서 학교에서 일을 마치고 부리나케 뛰어간 것이다. 더운 여름날 화장은 지워지고 곱슬머리는 정돈되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아빠는 엄마에게 별다른 느낌이 받지 못했다.
두 번째 만남도 사제관에서 이루어졌다. 엄마는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 곱게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고 미리 사제관에 도착했다. 아빠가 사제관 초인종을 눌렀을 때 엄마는 미소를 활짝 지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아빠는 엄마의 아름다운 미소에 반했다. 엄마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웠다며, 아빠는 나에게 종종 말씀하셨다.
두 신부님은 소개팅뿐 아니라 엄마아빠의 결혼식도 함께 하셨다. 두 신부님이 주례하는 혼인미사였다. 엄마와 아빠는 결혼하여 토끼같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두 번째 토끼가 바로 나다.
친할머니와 이모할머니
어릴 적 명절 때 친할머니·할아버지 댁에 가면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했다. 아빠는 나를 새벽 6시에 깨워 할머니 방으로 데려갔다. 할머니 방은 고모들과 고모부, 사촌 언니 오빠 동생들로 가득 찼다. 자리가 없을 땐 할머니 방과 연결된 옆방에서 함께 기도를 드렸다. 기도는 길었고 나는 졸렸다.
친할머니는 신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내가 가톨릭 5대 째니까, 할머니의 할머니부터 신앙을 가지고 계셨다. 친할머니 오빠는 신부님이 되셨다. 아빠의 사촌 누나가 수녀님이고, 나의 사촌 언니도 수녀님이다.
친할머니는 내가 12살 때 돌아가셨다. 내가 어릴 적부터 할머니는 건강이 안 좋으셨다. 주로 할머니 방에 계셔서 나와 많은 추억을 만들지 못하셨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명절 때 할머니 댁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 방으로 가서 절했던 기억, 할머니 방에서 함께 식사했던 기억, 할머니 돌침대에 앉아보았던 기억. 따뜻하고 좋은 분이셨다.
친할머니가 함께하지 못했던 나의 청소년기에는 이모할머니가 계셨다. 인생 첫 입시였던 예술고등학교 실기시험. 지방 출신인 나는 실기시험 한 달 전 서울 이모할머니 집에서 지냈다. 평소보다 자주 레슨을 받았고 무대 연습도 했다. 눈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매 순간 기도하며 연습했다. 악기 실력과 함께 신앙도 쑥쑥 자랐다. 후회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다.
혼자 그 시기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엄마가 함께 계신 날도 있었고, 엄마가 동생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시면 이모할머니께서 나를 챙겨주셨다. 고기를 드시지 않던 이모할머니는 나를 위해 고기 맛이 나는 양송이버섯을 구워주셨다. 어느 날 할머니는 당신 딸 집에서 김치를 담그셨다. 나는 집에 돌아오신 이모할머니와 마주 앉아, 작은 배추로 김장한 달콤한 생김치를 맛있게 먹었다. 이모할머니는 나를 특별히 아끼셨고 나도 이모할머니를 참 좋아했다.
고등학교 입시 경험은 그 이후로도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음악대학 입시 때도 그 시절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응원했다. 독일 대학에서 논문 쓸 때도 고등학교 입시 생각이 많이 났다. '그때도 해냈잖아. 충분히 할 수 있어. 잘 할 수 있어.' 스스로를 격려했다. 논문이 큰 산처럼 느껴지던 날에는 내가 어떻게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했다.
작년 6월 이모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독일 성당 저녁 미사에 참석해 이모할머니를 위해 기도드렸다. 아빠와 통화하며, 나는 이모할머니께 참 감사한 게 많다고 했다. 어쩌면 아빠 덕분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모할머니가 아빠를 참 예뻐하셨으니까. 아빠가 말씀하시길, 이모할머니가 대학 시절 (나의) 친할머니 도움을 받으셨단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이모할머니는 간호 학교를 다니다 뒤늦게 약학 공부를 시작하셨다. 그때 친할머니가 이모할머니를 재정적으로 도와주셨다고. 이모할머니는 항상 친할머니께 감사한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을 우리에게 베푸신 거라고 했다. 아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친할머니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친할머니가 계시지 않았더라면 아빠도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친할머니가 신앙을 갖지 않으셨다면 나도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을 거다. 나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삶의 중요한 시기를 지혜롭게 보내지 못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친할머니에게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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