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30일 토요일 오후 베를린 중앙역
독일어 섀도잉을 하려고 핸드폰에 이어폰을 연결했다. 하지만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섀도잉을 할 수 없었다. 이곳은 베를린 중앙역이다. 사람이 정말 정말 많다. 중앙역 꼭대기 Gleis 13에 서있는데 양 옆으로 기차가 왔다갔다 해서 너무 시끄럽다. 섀도잉은 못하겠다. 섀도잉 대신 괴팅엔에 가는 마음을 블로그에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에서 살다보면 가족이 가까운 곳에 없다는 게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좋은 독일인·한국인·외국인 친구가 있든, 남자친구가 있든, 여기서 가족을 이루었든 상관 없이 엄마아빠가 보고싶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친한 독일인 친구 고향집에 초대를 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 마음 한 켠엔
'나도 부모님이 계시는데! 나도 친구를 우리 부모님댁에 초대하고 싶다.'
부모님과 자주 연락하고 부모님댁에도 종종 방문하는 친구가 있다면
‚좋겠다! 나도 엄마아빠랑 가까이 있어서 엄마아빠 생각날 때 바로 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
인턴을 위해 다른 도시로 떠나는 친구를 볼 때도 그렇다. 부모님이 집 구하는 것도 도와주시고, 이사할 때도 부모님 차로 한 번에 딱 옮기는 걸 보면
'좋겠다! 우리 엄마아빠도 가까운데 사셨으면 도와주셨을텐데!'
나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기도 낳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아이를 낳으면 엄마아빠 도움이 꼭 필요할 때가 있다고.
나는 가족의 소중함을 일찍 깨달았다 독일 대학 2학년 때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이게 외로움이구나!'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은 아주 잘한 결정이었다. 헤어지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이별을 결심했을 때 괴팅엔 부모님을 찾아갔다. 나보다 인생을 오래 산 분들의 지혜를 듣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괴팅엔 부모님은 나의 편에서 나에게 무엇이 좋은지 말씀해주셨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괴팅엔 부모님이 정말 나의 부모님으로 느껴졌던 것이. '독일에서 이 분들을 부모님이라 생각해도 되겠구나!‘
그때부터 나도 괴팅엔 부모님께 마음을 전할 기회를 만들었다. 그 전까지는 항상 괴팅엔 부모님이 나에게 '연주회에 갈까, 함께 저녁을 먹을까, 나들이를 갈까' 물어보셨다. 내가 괴팅엔 부모님을 정말 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나서부터는 먼저 연락을 드리기 시작했다.
'부모님 저희 이거 하면서 만날까요? 파테메 언니가 빵집에서 알바를 시작했다고 하니, 언니 놀래켜주러 가볼까요?‘ (결국 성공은 못했다. 우리가 간 날이 언니가 쉬는 날이었음)
나의 좋은 부분만 보여 드리려 하지 않고 어려운 부분이나 실패했던 것도 솔직하게 말씀 드였다. 작은 성공도! 통계학 시험에서 A를 받은 이야기하며 함께 기뻐하기도 했다.
괴팅엔 가족에서 만난 파테메 언니와는 정말 언니 동생 같이 지낸다. 아직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프와 달리아는 조금 어색하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동생이 된다니 어색한 것이 당연하다. 내가 베를린으로 온 후로 자주 만날 수도 없었으니) 아직은 진짜 남매같지 않지만(웃음) 남매라 생각하고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여니, 사이프와 달리아도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작년에도 이번해에도 괴팅엔 가족을 만나러 갈 때는 사이프와 달리아 집에서 잔다.
독일에서 괴팅엔 부모님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괴팅엔 부모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내가 나이가 들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유학 온 학생들을 돕고 싶다. 내가 어떤 나라에 있던 그곳에는 유학을 온 학생들이 있을테니까. 타지의 팍팍한 삶에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고 싶다. 맛있는 밥도 해주고 함께 놀러도 가고.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이 글은 베를린 중앙역에서 남긴 음성 일기를 옮겨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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