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뮌헨행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자리 아이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 저 꽃 좀 봐요!"
아이는 탄성을 지르는데 내 눈에도, 그 젊은 엄마 눈에도 철로만 보이고 꽃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저기!"
아이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가 보니 자갈길 철로 중간에 들국화가 나지막하게 피어 있었다.
"아, 그렇구나. 엄마는 몰랐네."
"엄마, 저 꽃은 들판에 피는 꽃인데 어떻게 저기 피었어?"
"들꽃 씨가 바람을 타고 와서 뿌리를 내렸나 봐."
"엄마, 구름이 세 개 떠 있어."
유난히 청명하던 날이었는데, 새파란 하늘에 선명히 뭉쳐진 구름 세 조각이 떠 있었다. 고개를 돌리던 아이가 저기 두 개, 저기는 다섯 개...... 여기저기 손으로 가리키며 연신 감탄한다.
나는 이 나이까지 오는 동안 희망을 품고 감동하는 일에 얼마나 인색했던가? 작은 것에도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니 현실에 코 박고 있는 내 모습에 잠시 울적해졌다.
하루하루 탐험하듯 길 떠나는 아이들...... 내가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그들이 힘과 상상력을 주었다고나 할까. 아이들의 무궁무진한 호기심, 그 많은 시어와 동화들이 예술적 나래를 펼쳐 주었다. (30%)
당시 나는 아무것도 소유한 것 없는 철저한 가난뱅이였다. 아무리 가난한 독일 사람도 언어만은 소유하고 있다. 말할 자유가 풍부하게 주어진 민주주의 나라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 시장에 가서 빗자루 살 능력도 없는 '언어의 상실자'였다. 사전을 뒤적여 겨우 단어들을 찾고 외워서 고기와 채소를 사왔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는 독일어 학원을 다닐 만한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당장 아이 셋 뒤치다꺼리하며 가계를 책임지기도 바빴다. 당시에는 어느모로 궁리해도 바늘구멍만큼의 빛도 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고국에서 한 짐 싣고 온 창호지를 풀어 울먹이면서 아이들(종이인형)을 만들었다. 한국과 연을 끊는다던 여자가 창호지만은 손에 늘 달고 있었다. 그 종이를 대하면 어두운 현실을 잊어버릴 수 있었고, 아이들이 보송보송 태어나면서 내 인생에도 햇빛이 비껴들기 시작했다. 전시회 때 내가 만든 아이들과 함께 서 있으면 나는 더 이상 문맹자도, 가난뱅이도 아니었다. 작품들이 나의 언어를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미술 시장은 개념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말로 풀어내는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언어가 빈곤한 나로서는 도저히 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창호지로 잉태한 내 아이들의 이야기를 미술품 소장가들이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이방인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 주고 나의 아이들을 양자 삼아 준 독일인들을 지금도 존경한다.
세월이 흘러 나에게도 점점 정면으로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미술 평론가 데이비드 갤러웨이는 내 작품에는 서사가 있으며 세계적인 언어가 들린다고 평했다. 2011년 뮌헨 전시회 때는 한국인의 정서를 세계화시킨 언어라고, 신문 전면을 할애하여 내 작품을 평가해 주었다.
나는 만천하에 내 독일어 실력을 공개하는 것이 싫어, 지금껏 독일 방속국 인터뷰를 꺼려 왔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말 못하는 것이 죄는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비로소 당당하게 인터뷰 제안에 응할 수 있었다.
한번은 인터뷰하러 온 기자에게 말헸다.
"제 말 못 알아들었으면 다시 질문하세요."
나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는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충분히 잘 알아들었습니다. 지금 전시회에서 당신 작품들을 천천히 보고 왔거든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3%)
김영희 작가 홈페이지 http://www.kim-younghee.com/index.htm
김영희 작가에 관한 에세이 (영어, 독어) http://www.kim-younghee.com/pdf/RP_Kim-Galloway.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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