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있다

2019. 5. 5. 19:24일상 Alltag/하루하루가 모여 heute

2019년 5월 5일 어린이날 베를린

 

요즘 나의 머리는 5살 때처럼 자고 일어나면 까치집이 되어있다. 뒤통수 머리카락이 엉켜있어 거울엔 잘 보이지 않지만 뒤에서 보면 엉망이다 :-) 머리가 길어서일 수도 있고, 사랑니 뺀 후로 배게를 베고 자서일 수도 있다. 나는 평소에 배게를 사용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언젠가부터 배게 없이 자다가 편해서 그렇게 되었다. 어떤 조건에서든 쿨쿨 잘 수 있다 :-)

 

일요일 11시 47분이다. 오늘 오전에는 창문 청소를 했다. 방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 큰 창문이다. 창문 유리에 뿌연 먼지와 꽃가루 자국이 있어 깨끗하게 닦았다. 괴팅엔에서 독일인 룸메이트에게 배운 창문 청소법이었다.

 

그 룸메이트는 나에게 조금 불편한 사람이었다. 인간관계에서 불편한 사람이나 미운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 친구는 많이 불편했다. 처음 같이 살았을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배려가 전혀 없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 함께 살았던 다른 친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불편했던 룸메이트가 기숙사(3명이 함께 사는 WG)를 나가는 과정에서 나와 다른 룸메이트는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때 친한 친구에게 하소연을 했던 적이 있다. 나와 전공도, 성격도, 사는 방식도 전혀 달랐던 친구는 언제나 새로운 시각에서 나의 고민거리를 바라봐주었다.

 

"통로야, 그건 네가 누군가와 함께 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아닐까? 나는 혼자 살고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함께 살면서 배우는 게 많거든. 나는 그런 기회를 만들지 않았지. 너는 누군가와 함께 살면서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겠지만, 배우는 것도 많을 거야. 누군가와 함께 사는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친구의 말이 맞았다. 3명이 함께 사는 기숙사 WG에 들어간 건 나의 결정이었다. 독일인 룸메이트와 살면서 독일어 뿐 아니라 한 사람을 깊이 알 수 있었다. 독일인, 한국인 차이라기보다는 각각의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되었다.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내가 아플 때 룸메이트는 자신의 식사(구운 닭가슴살 반쪽)를 나눠주기도 했다. 나를 무시하는 듯한 의사를 만났을 때 함께 분노해주기도 했다. 

 


배려의 수행 - 혜민

 

친구나 가족, 룸메이트와 함께 사는 거,

도 닦는 수행과도 같아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지 않고

다른 사람 마음에 맞게 포기하고 절제하고

배려하는 것, 그게 수행이에요.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것,

그게 또 수행입니다.


 

함께 산다는 건 나를 동글동글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뾰족뾰족 모난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며 부딪히고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동글동글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이제 나는 단체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

 

단체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뿌듯한 이유는, 언제가 '나는 단체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의문을 가졌기 때문이다. 삼 남매 중에서도 혼자 좀 달랐고(9살 차이 나는 언니와 남동생은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가족에서도 좀 주장이 강한 딸이었다. 언젠가는 가족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이틀 동안 집에 혼자 있었던 적도 있었다. 동아리 선배 언니가 수녀님이 되는 걸 보면서 '나는 이런 단체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너무 답답할 것 같은데' 생각도 했다.

 

오늘 포스팅은 그야말로 생각의 흐름대로 써내려가는 일기 같다 :-) 나는 원래 일기를 두서없이 쓴다. 그래서 논문 쓰는 것보다 일기 쓰는 게 더 재밌다. 

 

 

나다운 나는 무엇일까? 스페인 순례길을 걸으며 만난 사람들과 대화하며 나다운 나를 느꼈다. 자유로웠고 즐거웠다. 과테말라에서도 나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었다. 생각해보니 독일에 처음 와서 어학원을 다니던 그때도 참 나다웠던 것 같다. 내가 가장 나다웠을 때는 익숙한 곳을 떠났을 때인가? 꼭 떠나야 하는 건 아니지만, 현재에 가지고 있는 고민과 걱정을 잠시 내려두었을 때였다.

 

나는 내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고 잘한다. 책이나 뉴스에서 읽고 들은 걸 말하기보다, 논문에서 읽은 걸 인용하기보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데 익숙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인지. 어제 친구와 카톡을 하면서 느꼈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술술 하면서 논문에 대한 내용은 준비가 필요했다.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나다운 나를 찾기 위해 여행만 다녀야하는 걸까?

 

나다운 나를 만든 건 지루하고 어려웠던 과정(학교 공부, 악기, 대학 공부 등)에서 배운 지식, 했던 생각, 만났던 사람인 것 같다. 그 과정을 통해 조금 더 깊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결론은! 주어진 공부 즐겁게 하고 해야하는 일 잘 처리하면서 짬을 내어 여행을 가는 것! :-)

오늘 하루도 잘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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