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마감, 쉼이 목표였던 2023년

2023. 12. 21. 07:34일상 Alltag/하루하루가 모여 heute

2023.12.21 새벽 6시 우리집

 

 

마지막 마감 기간이다. 2023년 2월 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고, 1년 동안 한국에서 지내보기로 했다. 4월부터 영문잡지와 외국어/한국어 수업 운영을 담당하는 업무를 시작했다. 저널리즘 경력이 없던 내가 바로 현장 투입되어 원어민 편집팀과 회의하고, 시에서 열리는 주요한 행사 자료 조사하고, 기사 주제에 맞는 외국인 기자 배정하고, 기관에 요청해 자료와 사진 받고, 한국어 자료를 영어로 번역해 외국인 기자에게 전달하고, 한국어 자료를 번역해 기사 작성하고, 문화예술행사 감독을 인터뷰하고, 병원 인터뷰를 하고, 잡지 편집 디자인을 하고, 인쇄할 파일을 인쇄소에 넘기고, 잡지를 배송할 800여곳이 넘는 주소록 관리를 하고, 월말에는 800여권이 넘는 잡지를 전세계와 한국 곳곳으로 보냈다. 9개월 동안 아홉 권의 잡지를 출판했다.

 

저널리즘 경력이 없었던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편집팀과 회사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다. 편집팀은 미국, 캐나다 원어민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나보다 저널리즘 분야에서 경력이 오래된 분들이다.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분들이라 기사 주제를 정하고 글을 교정하는데 탁월한 분들이었다. 나는 독일어 글쓰기는 배웠지만 영어 글쓰기는 배운 적이 없었는데, 편집팀에서 일하며 영어 글쓰기를 배울 수 있었다. 회사 사람들 도움도 많이 받았다. 오랜 기간 잡지 경력이 있는 선임과 일하며 시의성에 맞는 기사를 찾는 법, 편집팀과 소통하는 법, 편집 디자인까지 두루 배울 수 있었다. 

 

잡지 일은 빠른 속도가 생명이다. 그 속도가 버거울 때도 있었다. 마감 기간에는 다음달 기사를 찾아야했고, 잡지 편집 디자인을 하면서 외국인 기자에게 필요한 한국어 자료 번역을 해야하기도 했다. 마감 때는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지곤 했다. 지금 작업하는 1월호에서는 레이아웃(편집디자인) 작업을 70% 해 둔 파일이 갑자기 손상되었다. 복구가 되지 않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했다. 매일 파일을 저장해두는데, 그 저장해둔 파일이 보이지 않았다. 막막했다. 연말이라 결산 보고서도 써야하고 할 일이 많은데 편집 디자인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하다니…. 일이 터진 그저께 저녁에는 잠이 안 왔다. 잠이 들었지만 3번이나 깼다. 

 

그날 새벽 내 블로그 글을 보았다. 장영희 교수 책에 대한 내용이었다. 6년 동안 쓴 박사 논문 원고를 도둑 맞고 다시 논문을 써서 제출한 이야기였다. 그 책을 읽을 당시 나는 교통사고로 꼬리뼈와 허리를 다친 때였다. 모든 걸 잃고 다시 시작한 작가 이야기는 몸이 아파 일상이 무너졌던 내 상황과 닮아 있었다. 장영희 작가 글과 교통사고가 났던 내 글을 읽으니 지금 상황은 그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다시 시작하지 뭐. 레이아웃 다시 시작해야하지만 사진은 어디에 넣고 제목은 어떤 폰트로 하고 다 기억나잖아. 다시 해보자.“

 

과거에 내가 읽었던 책과 내가 썼던 글이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삶을 살다 넘어지고 일어나는 경험을 자주하다보니 이제는 덜 아파하고 짧게 주저앉아 있게 되더라. 

 

 

 

 

장영희 교수 책

 

다시 시작하기 -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장영희

2019년 5월 7일 화요일 베를린 장영희 교수님의 책은 고등학교 때 처음 읽었다. 미사에서 연주 봉사를 함께 했던 오르간 연주자 아주머니께서 '문학의 숲을 거닐다' 책을 선물해주셨다. 이후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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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후 요가를 하던 시기 쓴 글

 

금요일 아침 요가 - 요가를 하는 이유

2018년 3월 29일 금요일 베를린 베를린에 온 것은 도전이자 선물이었다. 지금까지 독일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학부 공부를 해낸 것의 보상이었다. 항상 학업에 허덕였지만, 나름대로 나만의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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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는 빛의 속도로 레이아웃 작업을 했다. 초집중을 하면서 점심 시간도 아껴가며 일했다. 추운 사무실에서 따뜻한 물도 자주 마시며 컨디션을 유지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라 회사 사람들은 일찍 퇴근했다. 저녁에는 길이 얼어 운전할 때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몇 명 안 남은 회사 사람들도 저녁 6시에 모두 집에 갔다. 나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편집 디자인(레이아웃) 작업을 했다. 연말까지, 이 추운 날씨까지 마감 작업을 해야하는 현실이 서러운 순간도 있었다. 마감을 하고 가면 너무 늦을 것 같아 아빠께 전화드렸다. 아빠 전화기가 꺼져있어 엄마한테 전화해보니 마침 아빠가 옆에 계시단다. 나는 마감 작업이 늦게 끝날 것 같은데 아빠가 데리러 올 수 있는지 여쭤보았다. 아빠는 흔쾌히 오시겠단다. 알고 보니 부모님은 우리 회사에서 10분 떨어진 곳에 계셨다. 엄마는 고층 건물 옥상에서 눈 내리는 사진을 찍고 있었고 (엄마는 사진 작가) 아빠는 엄마를 따라 오셨던 것이다. 홀로 사무실에 남아 추위에 떨며 작업하던 서러운 마음이 조금 사라졌다. 

 

두 시간 더 작업하고 저녁 8시에 회사에서 나왔다. 히터가 빵빵하게 나오는 차 안에서 아빠 엄마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가 눈 사진 찍은 이야기, 난방을 틀면 공기청정기를 틀어야한다며 엄마가 아는 분께 받아온 공기청정기 이야기(내 옆좌석에 공기청정기가 타고 있었다), 엄마가 사진 수업하러 운전해서 다니는 길이 너무 돌아가는 길이라는 아빠와 나의 주장(마름모꼴을 완전히 돌아간다는 아빠의 주장), 오늘 회사에서 선임과 나누었던 이야기(퇴사 후 계획), 늦은 시각이지만 집에 가서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이야기 등. 

 

사진: IJ Agnes Lee

 

어쩌면 나는 이런 시간을 위해 한국에 왔는지도 모른다. 회사 일이 크게 느껴지고, 때론 마감 으로 잠 못드는 밤도 있다. 하지만 회사 일 말고도 소중한 순간이 참 많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며 걷는 길, 주말 아침 까치집 머리를 한 아빠와 나누는 이야기, 엄마가 지역 사진 대회에서 대상을 타서 너무나 즐거워하는 모습 (나는 회사에서 엄청 힘들고 화나는 일이 있었는데 그날 엄마는 대상 시상식에 다녀온 날이었다.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랑스러운 걸음걸이로 집에 들어오는 엄마를 보니 웃음이 나오더라 ㅎㅎ), 엄마가 잠든 때 아빠랑 소곤소곤 나누었던 대화 (엄마는 귀가 매우 밝아서 작은 소리에도 깬다. 새벽에 깨면 잠을 잘 못들어서 아빠는 엄마가 잠잘 때 걸음걸이도 조심한다. 엄마가 낮잠잘 때도 마찬가지. 우리집이 방음이 잘 안 되기도 하고 ㅎㅎ),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나물로 차려 먹는 밥상 (어제 집에 와서 아빠랑 누룽지 끓여서 고사리나물, 무나물, 깍두기, 선물 받은 배추김치 두 종류를 맛있게 먹었다), 식기세척기를 사용하는 게 나날이 발전하는 아빠, 지난 주말 3년 만에 만난 친구랑 나누었던 대화 (줌과 전화통화로 연락해서 자주 만났던 느낌), 동네 사람들과 함께하는 송년회 (집에서 잠자고 있던 캐나다산 아이스 와인 가져갔는데 엄청난 인기였다! 위스키/럼에 과일과 화이트 와인을 섞은 맛. 맛있었음), 한국에서 오래 산 프랑스인 친구와 나누었던 이야기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게 많았다), 만나자 만나자 해놓고 내 일이 바빠 못 만난 친구랑 삽겹살 구워먹고 밤 산책하던 때, 동네 도서관에서 책 잔뜩 빌려와 읽던 순간 등.  사실 일은 핑계고 이런 순간을 갖기 위해 한국에 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에 쉬러 왔다. 쉴 구실로 2023년 동안 한국에서 일할 곳을 찾았는데, 본의 아니게 나를 너무나 성장시켜주는 일(못 쉬는 일)을 찾아버렸다. 신나게 일했다. 체력적으로 버거웠지만 정신적으로는 즐거웠다. 모든 조건을 갖춘 일은 없다. 재미도 있고 전공 분야에도 잘 맞고 내 역량도 발휘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데 워라벨까지 갖춘 곳은 없으니까. 마지막 마감 시기도 잘 보내고 있다. 어제 1차 마감(편집 디자인 끝낸 후 영어 감수) 끝냈고 오늘 2차 마감(디자인 및 영어 감수)하고 내일은 인쇄소에 보낸다. 마지막이다. 나는 쉬러 왔고 어떤 면에서 정말로 잘 쉬고 간다. 내년에는 다시 독일로 돌아간다. 

 

법정 스님이 일기일회에 쓰신 것처럼 모든 것은 단 한 번이다. 오늘 하루도, 잡지 1월호 마감도, 다가오는 2023년 크리스마스와 연말도. 이제 출근해야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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