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7일 토요일 오전 카페 in B
스페인, 베를린, 한국 순례길
아침 일찍 등산을 다녀와 샤워하고 선풍기에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밀리의 서재에서 '걷기'를 검색하다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 읽었는데 알고 보니 순례길 책이었다. 나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카페로 왔다.
누군가는 순례길을 인생의 버킷 리스트로 생각한다. 누군가는 매해 스페인 순례길로 떠난다. 누군가는 순례길 위에 산다. 나에게 순례길은 이별과 실패를 경험하고 떠나는 곳이다. 이별이 이별이 아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기 위해 걷는다. 나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나는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며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6년 전 첫 이별을 하고 스페인 순례길을 걸었다. 길 위에서 깨달았다. 그는 나에게 왔던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고. 내가 꼭 필요한 시기에 그는 와주었다. 나와 손을 잡고 길을 걷다가 때가 되어 헤어졌다. 나는 그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나도 그에게 사랑을 주었다. 순례길을 걷고 돌아와 나는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 첫 데이트로 순례길 영화를 보았으니 필시 순례길이 이어준 사랑이라 생각한다.
1년 전 학업에서의 실패를 겪고 베를린 순례길을 떠났다. 베를린 순례길을 걸으며 나는 지금까지 내 삶에서 실패한 모든 일을 떠올렸다. 실패는 실패가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최선을 다했고 최선의 선택을 했다. 순례길 위에서 나는 미래에 또 다시 실패할 나에게 음성 편지를 남겼다. 실패한다면 언제나 길을 걷자고. 순례길을 시작한 지 한 달 반 만에 나는 학업에서 좋은 소식을 들었다. 기대하지 못한 기쁜 일이었다. 계속 베를린 순례길을 걸었다. 날이 추워서 더 이상 걷지 못할 때까지.
한국에 와서도 순례길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별을 해서 길을 걷게 되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걷기로 했다. 스페인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를 향하여. 문득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곳을 먼저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 순례길을 시작한 이유가 내가 사는 곳에서 스페인을 향해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럽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순례길의 도착 도시인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를 향해 걷는다. 나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살았던 동네, 유아기를 보낸 동네, 유치원 다니던 동안 살았던 동네,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며 살았던 동네를 걸었다. 10일째 되는 날 순례길 위에서 지난 모든 사랑을 떠올려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 좋아하던 친구부터 초등학교 때 짝사랑하던 친구, 중학교 때 처음 사귄 남자 친구,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친구와 오빠, 대학에 와서 사귀었던 사람들까지. 6년 전에 헤어져 내가 순례길을 걷게 해 준 친구와 그 이후에 만났던 사람들도. 모두가 필연적이었다.
모두가 필연적이었다
1년 전 베를린 순례길을 걸으며 나의 모든 실패를 떠올렸다. 그 실패가 없었다면 현재의 나는 없었다.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인생의 디딤돌이었다. 내가 실패라 생각했던 점들을 이어보니 현재의 내가 있었다.
한국 순례길을 걸으며 나의 모든 지난 사랑을 떠올려보았다. 이별이 꼭 이별은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 사귄 사람들을 통해 나는 사랑을 배웠다. 우리는 연인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내며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나는 그들에게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나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항상 바라는 것이 있었고 그들이 변화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나는 좋은 사람들과 사랑하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마침내 나는 상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지난 사랑 덕분이었다. 나는 장애물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려두고 한 인간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의 따뜻한 사랑이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주는 사랑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해줄 수 있게 되었다. 지나보니 모든 사랑은 필연적이었다. 이별은 아팠지만 이별도 사랑에 포함된 것이다. 이별이 두려워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성숙한 사랑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이별과 실패
6년 전 처음 순례길을 걸었을 때 나는 이별이 실패라 생각했다. 그를 만나기로 한 내 선택이 실패라 느꼈졌다. 하지만 이별은 실패가 아니었다. 사랑에는 실패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부터가 성공이다. 사랑하는 과정에서 행복했다면 된 것이다. 사랑하며 성장했다면 더 좋은 일이다.
1년 전 베를린 순례길을 걸으며 '또 다시 실패할 나에게' 음성편지를 남겼다. 한국에서 순례길을 걸으며 음성편지를 몇 번이고 들었다. 큰 위로를 받았다. 1년 전과 1년 후의 상황은 달랐다. 1년 전에는 학업에서 실패를 경험했고, 1년 후에는 이별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통하는 무엇인가가 있더라.
1년 전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너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걷고 싶었지. 오늘 저기까지 다 못 걸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어. 내일 걸으면 돼. 내일 못 걸으면 다음 주에 걸으면 돼. 5년 전 너는 순례길 도착 지점 100km 전(스페인 사리아)에서 시작했고, 오늘 너는 3000km 전(베를린)에서 시작했잖아. 중요한 것은 네가 얼마큼 걸었으냐가 아니라 이 길을 걷는 그 자체야. 네가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이야. 또 다시 실패하면 다시 순례길로 오자. 실패한 그날 바로 와도 돼. 길 위에서 실망해도 돼."
1년 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너는 그 사람과 삶의 어느 지점까지 함께하고 싶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지. 괜찮아. 그 사람과 여기까지 걸어왔잖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네가 계획했던 그 지점까지는 다른 사람과 걸으면 돼. 순례길 잘 왔어. 1년 전에 매뉴얼을 만들어 놓아서 다행이다. 실패나 이별을 하면 바로 순례길을 걷기로 했던 것 말이야. 잘 왔어. 너는 이별이 이별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마음은 아직 슬프고 쓸쓸하니까 이 길을 걷자. 길 위에서 마음도 알게 되겠지, 이별이 이별은 아니라는 걸."
역사가 반복되듯이 나는 이별이나 실패를 겪으면 비슷한 감정을 갖는다. 한국에서 순례길을 걸으며 '또 다시 이별을 할 나에게' 음성 편지를 남겼다. 실패하고 이별할 미래의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다. 용기 있게 도전했으니 실패도 하는 것이고, 용기 있게 사랑했으니 이별도 하는 것이다.
실패와 이별은 지금 이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아직 젊으니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어 도전하고 사랑할 수 있다. 언젠가는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용기 있게 사랑했던 이 시간이 그리울지도 모른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말할 것이다.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용기있게 사랑해서 참 잘 했다고.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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