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28일 수요일 저녁
발췌: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준다는 것은 부자임을 의미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이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이다. 그는 자기를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빼앗긴 자만 이 뭔가를 주는 행위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의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한다. 그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그러나 그는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명에 무엇인가 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야기된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참으로 줄 때, 그는 그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하는 기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는 행위에서는 무엇인가 탄생하고 이와 관련된 두 사람은 그들 두 사람을 위해 태어난 생명에 감사한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사랑의 기술>을 반년 전에 처음 읽고, 며칠 전 내가 밑줄 그은 부분을 다시 읽어보았다. 책을 보며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을 오래 산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쓴 책 같았다. 시중에 많이 있는 사랑에 대한 책과 달랐다.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상대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랑의 시작부터 어떻게 사랑을 유지해나가는지 방법과 태도를 알려주는 책이다.
이번 글에서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것에 대해 써보겠다.
물질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
사랑하면 물질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을 더 많이 주고받게 된다. 나에게는 물질적인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내 나이 또래가 물질이 많이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이 얼마나 돈이 있겠는가. 나도 돈이 없다.
나는 사랑하며 사람의 내면을 보는 방법을 배웠다. 처음 소개팅을 했을 때 나는 상대의 외모, 말투, 전공, 옷 입는 스타일, 헤어스타일이 보았다. 그와 데이트를 하며 나는 강동원이 나오는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번 데이트 때 강동원 스타일로 머리를 잘라 나타났다.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모습이 신경쓰였다. 그는 내가 좋아할 만한 음악을 선곡하여 선물로 주었는데, 나는 그에게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나는 사람의 내면을 보게 되었다. 전 남자친구는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가 최고로 잘생긴 사람이었다. 어느 여름 그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은 옷을 입고 나왔는데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내가 그의 내면을 보게 된 것은 상대가 먼저 나의 내면을 봐주었기 때문이다. 전 남자친구들은 나에게 화장을 하라거나 어떤 스타일의 옷을 입으라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 중요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언제 웃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지가 더 중요했다. 내가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난다며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하니 전 남자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통로야, 너는 지금 이대로도 정말 예뻐. 다이어트 안 해도 돼."
내가 이 이야기를 말하니 엄마는 (그가 좀 귀엽다는 듯) 웃으셨다.
그들은 나를 바꾸려하지 않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었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부분도 그들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 덕분에 나도 이제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배가 나와도 괜찮다. 전 남자친구들도 귀여운 배가 있었다. 옷 스타일이 말이 안 돼도 괜찮다. 중요한 자리에 갈 때 내가 옷 입는 법을 알려주면 된다.
나에게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는지가 중요하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내가 그를 사랑하면 달리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는 한 사람이 성장하는 모습을 본다는 점이다. 그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덜 중요하다. 그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면 그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내 속에 살아있는 것을 준다는 의미는
그러나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의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한다. 그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그러나 그는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명에 무엇인가 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야기된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참으로 줄 때, 그는 그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하는 기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는 행위에서는 무엇인가 탄생하고 이와 관련된 두 사람은 그들 두 사람을 위해 태어난 생명에 감사한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이 부분을 보고 놀랐다. 내가 경험하고 생각한 것이 글로 잘 표현되어 있었다. 앞서 나는 물질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자기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을 줄 때 사랑을 느낀다. 그가 읽는 책과 영화(관심),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를 이해하는 그의 눈빛(이해), 내가 웃을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유머), 나의 슬픔을 공감해주는 마음(슬픔), 그의 작은 행복(자신의 기쁨)을 들으며 나는 미소를 짓는다. 내가 내 안에 살아있는 것을 줄 때도 나는 큰 기쁨을 느낀다. 이런 사람을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 하나보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한성희 작가가 인용한 니체의 문장을 소개해본다.
첫째 날에는 "이 남자와 대화가 되는가?"
둘째 날에도 "이 남자와 대화가 되는가?"
셋째 날에도 "이 남자와 대화가 되는가?"
철학자 니체는 "결혼할 때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라. 다 늙어서도 그와 대화를 잘할 수 있겠는가? 결혼해서 그 이외의 것들은 다 일시적인 것들이다"라고 말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한성희, 전자책 265/486)
이 남자와 대화가 된다는 건 내가 내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을 주고 이야기할 때 그가 이해한다는 의미같다. 처음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을 때는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너무 방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에 쓰인 것처럼 나의 기쁨, 관심, 이해, 지식, 유머, 슬픔을 그와 나눌 수 있다면 그는 나와 대화가 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의 표현처럼 우리는 무언가를 받기 위해 우리 속에 살아있는 것을 주지 않는다. 주는 자체가 기쁨이다. 상대를 위로하며 공감하는 그 자체가, 그리고 상대의 유머에 웃는 그 자체가 기쁨이다. 정말로 신기한 건 (프롬의 표현대로) 내가 준 것이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기쁨을 주면 그 기쁨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그에게 공감하면 그도 나를 공감한다. 대화를 하면 그가 나의 말투가 나와 비슷해진다. 문자하다 보면 그의 글이 나의 글과 비슷해진다. 나의 표현이 그의 문자에서도 발견된다. 내가 그에게 따뜻한 사람이면 그도 나에게 따뜻한 사람이 된다.
<사랑의 기술>은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발견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 인용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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