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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학과 새로운 학문 Uni/외국인 학생 생존기 Studieren

독서 카드 - 라틴어 수업, 한동일

by 통로- 2020. 2. 27.

2020년 2월 26일 수요일 밤 베를린

 

 

한동일 - 라틴어 수업

 

계기: 친구 P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공부하다 인생을 배운 작가. 책을 읽을 때 공감가는 내용이 많았다. 새롭게 알게 된 지혜도. 종종 책의 구절이 생각나 다시 열어보는 책이다. 특히 공부를 하다가 막힐 때 <라틴어 수업>이 떠오른다. 머리로 배운 것을 가슴으로 이해한 순간에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 이어 나의 인생 책이다. <학문의 즐거움>과 공동 1위를 달리는 ‘공부하면 보면 좋은 책’이다.

 

 

 

 

 

<라틴어 수업> 에서 소개 된 Arvo Pärt의 Spiegel im Spiegel. 독일어 제목이다 :) 내가 좋아하는 곡은 13:54 부터 15:44. 공부를 시작할 때 들어도 좋고, 오후에 피곤할 때 들으며 공부해도 좋다. 

 

 


"독서 카드 - 라틴어 수업"

 

 

사실 언어 공부를 비롯해서 대학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틀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학문을 하는 틀이자 인간과 세상을 보는 틀을 세우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향후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그것을 빼서 쓸 수 있도록 지식을 분류해 꽂을 책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 이런 식으로 학생들의 머릿속에 '책장'을 마련하는 작업은 이 책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로 나아갑니다. 사실 그것이 수업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

 

-> 음악을 공부할 때는 음악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니 사회과학이라는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다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통계 공부를 하니 일상을 분석하게 되더라. '오늘은 왜 공부가 안 되지? 잠을 못 자서 그런가? 어제 잠잘 때 추워서 몸이 좀 으슬으슬하군. 점심을 맛있게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공부가 안 되는군.' 등 공부가 안 되는 이유를 찾아보고 해결 방법도 만들어보았다. 

 


우선 '언어를 공부하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언어는 공부가 아니다'라는 역설적인 명제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언어라는 것이 다른 학문들처럼 분석적인 공부법으로 학습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꾸준한 습관을 통해 익힐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언어의 성질은 모국어를 뜻하는 영어 단어가 '마더 텅mother tongue'이라는 점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갓난아기가 '엄마'라는 단어를 인지하고 처음 발음하기까지 아기에게 그 단어를 1만 번 이상 들려줘야 한다고 합니다. 유년기에 엄마의 소리는 아이의 뇌 속에 언어를 비롯해 여러 가지 영역에 대한 방의 크기를 결정하고 그것의 가능성을 결정합니다. 아기는 엄마의 말을 통해 뇌의 용량을 늘려나가고 세상을 이해해나가는 것이죠. 아기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언어를 학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공부하지 않고 흡수하는 것입니다 (19%).

 

-> 언어는 흡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어를 시험을 위해 빨리 익혀야 할 때도 있다. 나에겐 독일어가 그랬다. 독일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독일어 능력 시험 점수를 1년 만에 받았지만, 그것이 내 독일어가 대학에서 공부할 수준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시험 유형을 잘 준비해서 통과한 것 뿐이었다. 대학 입학 후 독일어를 재정립했다. 지금도 재정립 중이다. 흡수하려고 노력한다. 독일어를 독일어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가끔은 어떤 단어를 바로 찾아보지 않고, 기억해두기만 한다. 비슷한 상황에서 그 단어를 계속 듣다 보면 이해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전공 용어도 굳이 한국어로 찾지 않고, 독일어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시간은 많이 들지만 시간을 들여 이해한 전공 용어는 기억에 잘 남는다. (모든 전공 용어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때로는 바로 그 의미를 이해하고 넘어가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한국어를 찾아본다. 또 한국어를 보아야만 이해가 가는 용어도 있다.) 독일어를 많이 듣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학술 독일어를 흡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차에 좋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SWR 2 Aula 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논문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서 이야기해준다. WG에 사는 것도 독일어를 흡수하는데 좋은 방법이다. 대학에서 배우지 않는 진짜 독일어를 배울 수 있다. Hast du schon den Müll ausgetragen? 쓰레기 버렸니? Darf ich mal kurz daran? 부엌에서 요리하는 룸메이트에게 (냉장고를 사용하기 위해) 잠깐 비켜줄 수 있는지 묻는 말이다. Der Untersetzer 냄비 받침 같은 단어도 배울 수 있다. 

 

WG에 살면 독일어 뿐 아니라 대화법도 배우게 된다. 함께 살면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때 자신의 주장을 상대에게 관철하게 된다. 부탁일 수도 있고 불만일 수도 있다. 독일 사람은 대화할 때 직설적이지만 기분은 상하지 않게 말한다(물론 기분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어느 나라나 있기 마련이니). 독일인들과 살며 그들의 대화법을 배웠다.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

세네카가 말한 이 문장[...] 즉 라틴어의 발음 하나에도 그 안에는 단순히 언어적 측면만이 아니라, 각 국가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등 다양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언어는 공부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20%).


"언어는 공부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언어의 습득적, 역사적 성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주의 깊게 봐야 하는 이유는 언어의 목적 때문입니다. 언어는 그 자체의 학습이 목적이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로서의 목적이 강합니다. 앞의 강의에서 말했듯이 언어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틀입니다 [...] 언어 학습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학습의 방향성이 다른 학문들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 즉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 그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점이 바로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라는 말에 부합하는 공부의 길이 될 겁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학교와 집에서 "공부해서 남 주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하지 못했던 대답을 지금은 자신 있께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꿈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공부한 사람의 포부는 좀 더 크고 넓은 차원의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기보다 더 많은 사람, 더 넓은 세계의 행복을 위해 자기 능력이 쓰일 수 있도록 하겠다는, 한 차원 높은 가치를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워서 남 주는' 그 고귀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요?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공부를 해나가는 본질적인 목적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왜 공부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공부하는가?' 스스로에게 되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2%)


우리는 다른 사람을 관찰하듯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관찰합니다. 다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할 뿐이죠. 특히 자신의 단점에 대해서는 더 모르는 척합니다. 자신의 약점과 맞서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약점이나 단점과 직면했을 때 시선을 돌려 자신의 환경에 대해 불평해요. 측히 부모님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불평하는 것은 가장 하기 쉬운 선택입니다. [...]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단점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어요. 우리가 스스로의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단점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있고요. 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저는 몸이 약한 편이라 시험 기간이라고 해서 공부를 몰아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시간을 쪼개 규칙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했어요. 몸이 약한 단점이 공부를 규칙적으로 하는 장점이 된 셈이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장점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는 단점이 되었습니다. 공부에만 몰입하다보니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드물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하고 서로를 알아가고, 그러면서 친분을 쌓는 일에 서투릅니다. 이 나이쯤 되면 누구를 만나든 좀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게는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에요. 간혹 제 강의를 듣고 저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다며 찾아오는 분들이 있지만, 저는 그런 상황에 처하면 긴장하고 부담을 느낍니다. 마이크를 잡고 강의하는 일은 몇 시간이라도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누는 사소한 대화는 지금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청년 시절에 건강도 변변치 못한 가운데 긴 시간을 공부에만 메달리다보니 일상에서 누군가와 친분을 이어가고 서로 마음을 나누는 관계맺기의 경험이 드물었던 탓입니다. 이 부분이 저의 오랜 데펙투스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

 

마찬가지로 어제의 메리툼이 오늘의 데펙투스가 되고, 오늘의 데펙투스가 내일의 메리툼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가 없죠. 우리는 무엇 하나 명확히 답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살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무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메리툼이고 데펙투스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성찰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곁가지를 뻗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내 안의 땅을 단단히 다지고 뿌리를 잘 내리고 나면 가지가 있는 것은 언제든 자라기 마련입니다. [...]

 

여러분의 메리툼은 무엇입니까? 데펙투스는요? [...] 삶이란 끊임없이 내 안의 메리툼과 데펙투스를 묻고 선택하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순간에도 묻고 답하는 중입니다. 여러분도 스스로 들여다보고 묻고, 답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