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4일 토요일 아침 9시 20분 우리 집 내방
(09:20-10:05)
우리 집에 웃음이 돌아왔다. 내가 웃으니까 부모님도 웃으신다. 아빠는 주말 아침 오이와 당근을 썰고 계신다. 엄마는 검은 머리로 셀프 염색을 하고 사진 수업에 갈 준비를 하신다. 조금 독특한 블라우스를 입고 머리 드라이에 화장까지 마친 엄마. 바쁜 발걸음으로 거실과 안방을 오가신다.
아빠: 멋진 옷이네!
엄마: 이 옷 뚱뚱해 보이나?
나: 엄마가 뚱뚱하지 않은데 왜 뚱뚱해 보이겠어? 엄청 스타일리시해!
우리집에 웃음이 돌아왔다. 지난 2주 동안 우리 집에는 웃음이 사라졌다. 내가 이별을 하고 기분이 많이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며 하는 이별이 이런 것이구나 실감했다. 전 남자친구들은 부모님과 함께 살았었는데,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이제 그들을 이해한다.
나는 이별할 때마다 혼자였다. 전 남자친구들은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별 후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가족과 함께 일상을 보내겠구나. 나는 혼자인데. 나에겐 그가 없는 일상이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데 그는 가족과 함께 있으니 내 빈자리가 별로 크게 느껴지지 않겠지?'
첫 번째 이별에서 깜깜한 외로움을 느꼈던 나는 두 번째 이별 후에는 동생이 사는 도시로 갔다. 우리 가족은 사랑, 이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동생에게 이별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동생이 사는 도시로 가서 이틀을 보냈다. 고모님과 오랜 친구도 만났다. 이별 응급조치를 했다.
이번 이별은 부모님과 함께 겪었다. 한국에서 맞이한 이별이었기 때문이다. 티 안 내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처럼 안 되더라. 내 주말 일정이 없어졌으니 부모님은 아실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웃음이 사라졌으니 부모님이 눈치채실 수밖에 없었다. 지지난주 주말 내가 어두운 방에서 노트북을 하고 있었을 때 엄마가 노크를 하고 들어오셨다. 저녁 식사가 다 되었다고 말하러 들어온 엄마는 흠칫 놀라셨다. 내가 어두운 방에서 노트북을 하고 있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감정은 엄마와 아빠에게로 퍼졌다. 내가 웃지 않으니 부모님도 웃을 일이 없어졌다. 나는 이별한 상대의 이름을 꺼내고 싶지 않았고 그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별 후 시간이 어려울지 알고 있었다. 그와 만나며 설레고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 만큼 슬프고 쓸쓸한 시간이 올 것이라 알고 있었다. 이별도 사랑에 포함된 거니까. 하지만 이별의 아픔을 알고 있다고 해서 이별이 쉬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난 이별을 겪으며 이별 매뉴얼을 만들어 놓아서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별 후 많이 걸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요가와 명상을 하고 독일어 기도문과 일기일회(법정) 책을 읽고 걸었다. 날씨가 더운 날에도 걸었다. 슬프고 쓸쓸한 내 마음에 비하면 8월의 뜨거운 날씨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걸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나는 성숙한 사랑을 했고, 그가 나에게 와주어서 고마웠다고.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고. 거의 모든 날이 슬펐다. 쓸쓸했다. 어떤 날에는 화가 났다. 저녁에 호수 공원을 걸으며 화가 났다. 화나는 감정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 또한 이별에 포함된 과정이라 생각하며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었다. 그래 화날 만도 했지. 화날 수 있었겠다. 그럴 수 있지. 내 마음이 말하는 화나는 모든 지점들을 공감해주었다. 집에 들어와 샤워하고 잠잘 준비를 하며 도종환 시인의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를 읽었다.
저잣거리에 사는 동안 사람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하는 것도 사람이다. 한때는 소나무 옆에 잣나무 있듯이 그렇게 서서 어깨를 기대고 서로의 그늘이 되어주고 버팀목이 되고자 했던 사람이 어느새 서로에게 실망하고 돌아서고 미워하며 바늘잎으로 서로를 찌르며 살아간다. 서로에게 기대하던 것을 채울 수 없어 답답해하다 서로를 원망의 칼로 베어 상처내고 그 피가 여울을 적시며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생각이 깊어 분노로 자신을 태우고 상대를 태우고 그냥 두면 숲 전체를 다 태워버릴 것 같은 날이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고 가장 슬프게 우는 삶을 살면서 괴로워한다. 뜨거운 인연으로 만났다가 악연을 만들어가지고 돌아서는 어리석은 삶을 사는 동안 나는 오늘도 얼마나 많은 악업을 짓는 것일까.
'어리석은 사람은 오직 남의 악만 볼 뿐 자신의 악은 보지 못하며, 자신의 선만 볼 뿐 남의 선은 볼 줄 모른다'는데,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는 자는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며,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자는 오류가 많으며, 모든 경전을 다 안다고 장담하는 자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법률 삼매경>에서는 말하는데, 우리는 상대의 잘못만 가지고 분노하고 자신의 선한 면만 온갖 지식을 동원하여 주장하며 칼날을 세운다.
나는 언제나 정당하고 상대는 언제나 그리고 잘못된 점이 많다고 믿는다. 내가 너 때문에 아프다고 하면 아플 이유가 어디 있는지 대보라고 따지기만 한다. 내가 납득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 상대가 아프면 아픈 것이다. 아프니까 아프다고 하는 게 아닌가. 왜 아프다고 공박할 게 아니라 아픈 곳을 치유할 궁리를 더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떠나야겠다고 하면 뭐가 부족해서 떠나느냐고 소리를 친다. 그가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다. 내가 모른다고 큰소리칠 것이 아니라 그가 어디에 있어야 행복할 수 있는지를 헤아리지 않고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잠시 함께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그 인연을 풀어져 흩어지게 되어 있는데 말이다. 바람 같은 걸 붙잡고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다. 알면서도 왜 그게 정작 내 문제가 되면 아는 대로 행하게 되지 않는 것일까. 고통의 바다를 건너갈 나룻배 한 척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운명의 길은 늘 준비한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것 때문이 마음이 더 앞아서 앞으로 가야 할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도종환,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265-267쪽)
아, 나는 그의 과오에만 집중하고 있었구나. 나도 그에게 실수한 일이 많았을텐데 나는 선하고 그는 그르다고 생각했구나. 책을 읽으니 마음속 화가 가라앉았다. 화낼 일이 아니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화날 수 있었다. 화난 내 마음을 공감해주고 책을 읽으니 모든 게 이해 갔다.
다음날 아침 길을 걷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에게 준 상처는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도 누군가에게 상처 받았고, 그 상처를 준 사람도 누군가에 의해 상처를 받았다. 그 누군가도 어떤 사람에 의해 상처를 받았다. 내가 알고 있는 상처의 연결고리는 (나부터 시작해서) 5단계였는데 어디에도 당사자의 잘못은 없었다. 그 누구도 원해서 상처 받지 않았고, 의도해서 상처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별한 상대에게 탓할 것이 없었다.
물론 내가 그에게 모진 말을 쏟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 상처의 연결고리를 내가 끊고 그와 좋은 이별을 하면 여기에서 상처가 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고 그에게 상처를 준 사람 S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S에게 상처를 준 사람 Y도 좋은 사람이고 Y도 의도해서 그런 상처를 주지 않았다. 어떤 환경에 의해 받은 상처이기 때문이다.
글만 보면 내가 부처처럼 온유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나도 상대에게 서운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길을 걸으며 생각하니 그가 나쁜 의도로 행동하고 말하지 않았더라. 걷기의 치유력이랄까? 걸으며 나를 이해하고 그를 이해한다. 아직 이해의 과정은 끝나지 않았다. 이별 후 쓸쓸함이 내 마음에 남아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용기 있게 사랑했다. 내 마음을 보여주고 상대에게 다가갔다. 상대도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행복했다. 행복했으면 된 거다. 사랑했으니 되었다. 지금 내 마음은 쓸쓸하지만 1년 후, 5년 후,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말할 것이다. 잘 사랑했다고. 용기있게 사랑해서 참 잘했다고. 찬란한 여름에 아름답고 반짝이는 사랑을 했다.
다시 나에게 웃음이 돌아왔다. 평소의 나로 돌아오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웃으니 부모님도 웃으신다.
덧붙이는 이야기:
나의 지난 사랑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너희들도 부모님과 이별을 공유하며 이런 시간을 보냈겠구나. 너희들도 나처럼 고충이 있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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