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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Alltag/하루하루가 모여 heute

네가 어떤 삶을 살든

by 통로- 2020. 10. 11.

2020년 10월 10일 토요일 저녁 베를린 P

 

 

 

 

 

이틀 전 아버지 문자를 받았다.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해달라고 하셨다. 아빠의 책 주문 부탁은 처음이라 반가운 마음에 바로 결제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아빠께 책 배송을 부탁했다. 특히 아빠와 함께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그랬다. 이번에는 아빠가 나에게 책 부탁을 하셨다. 나와 함께 읽고 싶은 책이라는 아빠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전자도서관에서 찾아보니 책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나도 읽기 시작했다. 어제 전자책으로 27/371까지 읽었다. 

 

('아버지'와 '아빠' 두 표현이 사용됩니다. 평소에는 '아빠'라고 부르지만 글에는 제 나이도 있고 하니 '아버지'라는 표현을 써야 할 것 같아서요. 하지만 '아버지'는 너무 멀고 어려운 느낌이 들어요. 두 표현의 과도기입니다.)

 

아버지께 이 책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여쭈어보았다. 아버지는 <한동일의 공부법>에 소개된 책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읽고 싶어서 아버지와 함께 읽고 싶어서 부모님 댁으로 주문한 책이었다. 한동일 작가의 책을 보며 공부하는 삶을 배운다. 한국 종이책이 귀한 내방 책장에 한동일 작가의 <라틴어 수업>과 <로마법 수업>이 자리 잡고 있다.

 

오늘 오후 명상을 하려고 눈을 감았는데 아빠가 부탁하신 <철학의 위안>이 생각이 났고 <한동일의 공부법>도 떠올랐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왜 공부를 하나? 나는 공부를 좋아하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어쩌다 공부를 하게 되었을까? 나는 내가 공부할 사람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어쩌다 석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현재 공부하는 삶을 살고 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앉아서 공부하는 게 지루해서 악기를 하기로 했는데! 인생은 정말 모를 일이다. 

 

작년에 학사논문을 쓰면서 악기나 공부나 마찬가지라는 걸 알았다. 몸을 움직여 연습하는 악기는 공부보다 동적인 활동이긴 하다. 동적인 활동이 나에게 잘 맞아 어릴 적 음악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같은 곡을 매일 반복하며 연습하여 조금씩 발전시켜나가는 음악이나, 책을 읽고 매일 글을 쓰며 조금씩 깊어져가는 공부나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하든 삶을 사는 모습은 다르겠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비슷하다.

 

악기를 계속해서 음악가가 되었든 학문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살든 결국은 같은 것이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음악을 했고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는지 목적이 같기 때문이다. 

 

수도자가 될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그 고민은 지금도 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매일 기도하는 삶이 지루할 것 같아 수도자의 삶이 망설여졌다. 독일에 오기 전 성소 모임에 몇 번 나간 적이 있는데,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수도자의 삶이 내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유학가서 하고 싶은 공부도 있고 새로운 경험도 많이 해보고 싶었다. 수도원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주어지는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 나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유학을 와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가 바닷가 모래알처럼 작은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나의 부족함을 느꼈다. 부족한대로 매일 성실히 사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수도자가 되지 않고 나의 하루를 자유롭게 계획해서 살고 싶기도 하다. 가족을 이루고 싶은 마음도 있다. 부모님처럼 살면서 나와 닮은 딸과 아들을 낳아 그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도자가 되든 되지 않든 내 삶의 방식은 비슷할 거라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다르겠지만 삶의 방향과 가치가 동일하다면 결국 같은 삶이라고. 어디에 살든 무슨 일을 하든. 그래서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물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기로 했다. 

 

Lee Injae Ag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