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하루 - 식구, 일상적인 대화, 엄마가 숨겨놓은 도토리 옷

2021. 6. 16. 00:04일상 Alltag/하루하루가 모여 heute


2021년 6월 15일 밤 11시 40분 우리집

 


하루를 여유롭게 보낸 날이다. 어제 수업이 새벽 1시에 끝났다. 새벽 1시 반에 잠이 들었고 평소처럼 5시 반 즈음 눈이 떠졌다. 새벽 6시에 친구들과 온라인에서 만나 근력운동을 했다. 조금 수다를 떨다가 다시 잠들었다.

11시 즈음 일어나 침대에서 아침 요가를 했다. 거실로 나가 부모님께 아침 인사를 드리고 명상, 저녁 요가, 확언 명상을 했다. 소파에 앉아계시던 엄마가 물었다.

"영상에서 요가 동작을 설명해주는 거니?"

독일어 요가 영상을 틀어놓으니 엄마가 궁금하셨나 보다. 확언 명상까지 마치고 독일어 기도문을 읽었다.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삑삑삑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텃밭일을 하시던 아빠가 돌아오셨다. 우리는 엄마가 미리 준비해두신 점심 식탁으로 갔다. 나는 아침을 먹지 않아서 사과 몇 조각을 먹은 후 점심을 먹었다.

요즘 텃밭에 오이가 잘 자란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나와 부모님은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사이가 식구라 한단다. 나는 식구와 함께 살아서 정말로 좋다.

점심을 먹고 부모님과 주말여행 계획을 세웠다. 내가 거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한 지 몇 분 되었을 때 부모님은 나가셨다. 엄마 차 수리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이 떠나신 후 나는 조용한 집에서 즐겁게 공부했다. 이번 학기 시험과 에세이 제출일자를 체크했다. 베를린 글쓰기 센터에서 알게 된 친구들을 만나 줌에서 공부했다. 시험 공부를 하다보니 모르는 게 많았다. 하지만 아는 것도 많아서 괜찮았다. 나의 목표는 시험 통과다. 수업 내용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완벽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두 과목 시험 공부를 했다.

'늦은 오후(Spätnachmittag)에 듣는 음악 플레이 리스트'를 들으며 공부하고 있을 때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엄마는 내가 듣고 있던 부르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 참 좋다고 하셨다. 엄마와 소소하고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나는 방에 들어가 친구와 통화했다. 회색 티셔츠를 입고 엄마 목걸이도 했다. 영상 통화에서는 목걸이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회색 티셔츠와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한국에 와서 엄마 옷을 많이 선물 받았다. 엄마는 옷을 보는 눈을 갖고 계신데 가끔 당신이 어떤 옷을 샀는지 잊어버리신다. 다람쥐가 숨겨놓고 잊어버린 도토리가 도토리나무가 되듯 엄마가 사고 잊어버린 옷을 내가 꺼내 입는다. 엄마와 나는 체형이 비슷하여 옷을 함께 입을 수 있다. 하의는 별로지만(엄마 바지는 나에게 잘 안 어울린다) 상의는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린다. 우아한 티셔츠, 남색 바바리, 봄에 걸칠 재킷, 느낌 있는 검은 후드티, 하늘하늘한 블라우스, 아이보리 레이스 상의 등 예쁜 옷이 참 많다. 집에 혼자 있던 어느 날 나는 엄마 옷장에서 옷을 하나하나 꺼내 입으며 코디를 해보았다. 어울리는 가방, 신발을 꺼내보며. 집에 돌아오신 엄마께 보여드렸다. 많이 놀라시더라. 엄마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옷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미니멀리스트는 아니다. 옷에 관하여는 맥시멀리스트에 가깝다. 아빠는 정리를 잘 하고 미니멀리스트 성향을 갖고 계시다. 아빠는 '엄마가 옷을 좀 정리하고 버렸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계신다. 이번에 내가 한국에 와서 엄마 옷을 많이 입는 걸 보며 아빠는 내심 기뻐하신다. 내가 엄마 옷을 독일로 많이 가져가길 바라는 눈치다. 맥시멀리스트 엄마 덕분에 나는 한국에 와서 새 옷을 많이 안 샀다. 가을에는 옷을 아예 안 사도 될 듯하다.







어제 아침 등산을 하다가 미끄러졌다. 병원에 가니 '염좌'라고 했다. 발에 압박 붕대를 착용하고 플라스틱으로 된 깁스를 처방받았다. 다리 뒤를 플라스틱 깁스가 고정하고 앞은 찍찍이로 고정한다. 삐끗한 발목 덕분에 나의 삶은 느려졌다.

느린 삶이 그리운 터였다. 독일에서는 나만 잘 챙기면 됐다. 한국에 오니 나를 챙겨주는 부모님과 친구들 덕분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 달이 넘어가니 내가 나의 중심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부터 나만의 시간을 갖으려고 노력한다. 부모님이 예고 없이 내 삶에 깊숙이 들어오실 때 (잔소리) 상냥하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빠른 대한민국에서 나는 느리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저녁 수업을 듣고 방 정리를 했다. 옷 맥시멀리스트 엄마가 옷방으로 쓰는 곳에 내가 머물고 있다. 방 구조를 조금 바꾸어 정리를 해보았다. 연두색 책장을 정리해 내 책과 옷을 넣었다. 방에 엄마 옷이 많아도 너무 많다. 하지만 이 옷은 모두 내 옷이 될 수 있으므로 관대해지기로 했다. 엄마는 당신의 옷을 딸에게 주시는 걸 매우 기뻐하신다. 나는 행복한 딸이다.

오늘 서재 서랍을 살펴보다 작은 지갑을 발견했다. 한국에서 쓸 지갑이 없었는데 잘 되었다 싶었다. 내가 머무는 방으로 돌아와 소중한 물건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두었다. 노트, 필기구, 책, 오늘 발견한 작은 지갑, 엄마가 서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예쁜 색 립스틱.

환한 형광등 대신 침대 옆 탁자에 작은 스탠드를 켜니 방이 아늑해졌다. 이해인 수녀님 시집과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었다. 내가 원하던 느리게 사는 삶. 아늑한 조명 켜고 책 읽으며 잠드는 습관이 생기면 좋겠다. 글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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