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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Alltag/안녕 독일어 Deutsch

독일어 번역 세계 입문기

by 통로- 2020. 9. 1.

2020년 9월 1일 화요일 새벽 4시 21분 베를린

 

어쩌다 보니 새벽 4시다.

 

• 토요일에는 순례길 + 번역 과제를 내며 하얗게 불태웠고

• 일요일은 비 오는 순례길 (가장 많이 걸은 날) + 저녁 일정 + 변역 과제를 하며 또 하얗게 불태웠고

• 월요일 저녁에는 지난 학기 수업 Wissenschaftsdeutsch 포트폴리오를 쓰며 또 한 번 하얗게 불태웠다.

 

3일 동안 늦은 밤까지 압박을 견디며 무엇인가 제출했다. 평소라면 이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3일은 어쩔 수 없었다. 번역 수업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학교, 새로운 학문, 새로운 도시, 새로운 나라 등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할 때는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튼 3일 밤을 하얗게 불태운 덕분에 오늘은 저녁 10시에 잠들었고 새벽 2시 50분에 깼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정신이 맑아졌다. 어제 포트폴리오 제출하고 거의 쓰러져 잠들어서 이를 안 닦은 것이 생각나 다시 욕실로 갔다. 이 닦고 세수까지 하니 정신이 더욱 명료해졌다. 새벽 4시에 깨어있는 것은 드문 일이니 글이나 써 보자 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이 글은 <독일어 번역>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입문한 나에게 쓰는 편지다. 나는 종종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쓴다. 학사 논문 시작 전에도 편지를 썼다.

'분명 어려움이 있을 거야. 하지만 논문을 시작한 첫 마음을 항상 기억하자! 내가 관심있는 주제로 쓸 수 있고 좋은 지도 교수님도 계시니 얼마나 좋니!'

응원의 손편지를 썼다. 학사 논문을 쓰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편지를 읽었다. 과거의 나에게 응원을 받았다. 

 

독일어 번역 과제를 하면서 나는 또 머리를 쥐어짤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초심을 기억한다면 '내가 이 정도나 할 수 있네!' 감탄할 것이다. 

 

 


 

독일어 번역 세계 입문

 

 

독일어 번역 세계에 입문했다.

 

누가 오라고 해서 간 것은 아니고,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9월부터 10월까지 두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번역 수업을 듣는다. 수업만큼 중요한 것은 과제다. 내가 제출한 과제로 피드백을 받으며 이루어지는 수업이기 때문이다. 수강생은 총 네 명이다. 수업에서 네 명의 번역을 함께 보며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번역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통번역 대학원 수업 방식이란다.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미래의 나에게 응원 편지를 쓴다.

 

 

 

 


 

첫 번역 아르바이트

 

 

3년 전 처음으로 번역 알바를 했다. 잘 알고 지내는 박사님께서 독일(동독)의 문화 유산에 관련된 내용을 번역 의뢰하셨다. 모든 내용을 번역하는 것은 아니었고, 위기피디아 페이지와 문화유산 법 조항을 읽고 중요한 내용만 요약 번역하는 것이다. 

 

박사님이 주신 자료를 대충 보니 이해할 수 있었고 번역할 수 있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처음 들어온 번역이라 기쁜 마음이 컸다. 기쁜 소식을 부모님께 전하니 (아버지와 주말마다 통화하던 시절)

 

"괜찮겠어? 번역 아르바이트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없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버지의 괜한 걱정이라 생각했다. 자료를 이해할 수 있었고 처음 들어온 번역이니 좋은 경험이라 생각했으니까. 

 

부모님 말씀 하나 틀린 것 없더라. 일단 좀 웃고 ㅋㅋ 진짜 그 번역하면서 '똥줄 타는' 경험을 했다. 순화해서 표현하지면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내 부족함을 느꼈다. 법 조항 번역은 무슨 ㅋㅋㅋㅋ 위키피디아 페이지 요약 번역하는데 거의 10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학교 공부에 영향이 갔다. 번역 아르바이트는 제출 기한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며칠은 공부를 전혀 못했다. 법 조항 번역은 도저히 못할 것 같아서 번역을 의뢰하신 박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법 조항을 독일어로 읽으면 이해가 갔는데 한국어로 옮기는 건 다른 문제더라. 독일어 단어 뜻을 정확히 알고 이해한 부분도 있지만 문맥 상 이해한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몇 십년 전(독일이 분단 된 후) 만들어진 법 조항이라 조금 다른 독일어였다.

<1. 법률 독일어 + 2. 예전에 쓰이던 독일어> 어려운 조합이었다. 

 

결국 제출기한 마지막에는 독일인 친구를 앞에 앉혀두고, 친구에게 미묘한 독일어 의미 차이를 물어보며 위키피디아 페이지 번역을 했다. 법 조항보다 훨씬 쉽고, 독일어로 어려움 없이 이해했던 위키피디아 페이지 조차도 번역하기는 어려웠다.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깨달은 점:

1. 번역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기술이 필요하다. 나는 기술이 없으니 배워야 한다. 기회가 있으면 제대로 번역을 배워보자.

2. 번역 아르바이트는 신중하게 고민하고 하자. 학업이 가장 중요하다. 번역 알바하려고 학업에 집중 못 해 졸업이 늦어지면, 알바로 버는 돈 보다 더 큰 돈을 잃게 된다. 나는 이미 충분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너무 욕심내지 말자.

3.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 번역 의뢰를 해주신 박사님께 감사하다.

4. 독일어 공부 꾸준히 하자.

 

 


 

두 번째 번역 의뢰

 

3개 월 전 번역 알바 문의가 들어왔다. 1년 전 독일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서 강의를 하는 아기 박사님(그 분의 표현이다)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제일 믿을 만해서' 가장 먼저 물어본다는 문자를 받고 기뻤다. 

 

하지만 지난 번역 알바로 나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알았기 때문에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 아르바이트에 투자할 시간도 부족했다. 학업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번역 의뢰를 하신 분께는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아기 박사님은 나를 잘 이해해 주셨다. 

 

번역 알바 문의로 깨달은 점:

1. 감사하다. 내가 믿을 만해서 연락하셨다니!

2. 이제 나에게 전공 관련 번역 알바가 들어오겠구나. 번역 연습을 해야겠다.

3. 잘 했다. 나의 실력과 상황(번역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음)을 잘 판단했구나.

 


 

응원 편지: 알맞은 시기에 좋은 기회

 

 

아무도 하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번역을 배우겠다고 번역 수업을 신청했다. 고생 예약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번역을 배울 수 있을까? 번역 수업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정리해보았다. 

 

1. 방학이다. 매일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 매일 소논문을 써야하지만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2. 코로나 시대라 비대면 수업이 가능해졌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번역을 배울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3. 대학생은 번역을 배우기 좋은 때다. 직장인이 되어 번역을 배우면 더욱 시간에 쫓길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

4. 알맞은 시기에 좋은 기회가 왔다. 나는 지금까지 독일어 끈을 놓지 않고 꾸준히 배웠다. 어학원에서는 어학원 수업을 즐겁게 들었고, 대학에서는 전공 수업 예습과 복습 뿐 아니라 친구들과 그룹을 만들어 공부했다. 전공 수업 외에도 말하기와 글쓰기 수업(토론 수업, 설득력 있게 말하기, 발표하기, 학술적 글쓰기 등)을 들었다. 독일 사람들과 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임했다. 작년부터 뉴스 섀도잉을 하며 정확한 독일어 발음 연습을 하고 있다. 저널리즘 독일어에도 익숙해지는 중이다. 번역을 배우기에 이렇게 알맞은 때가 있을까? 

 

5. 그동안 독일어 배우기에 적극적으로 임해왔듯 번역 수업을 듣는 것도 적극적인 자세다. 잘 하고 있다. 

 

번역 과제를 하며 '진짜 어렵다. 괜히 한다고 했나?' 생각이 들 때마다 이 글을 보기로 했다. 첫 번째 과제를 하며 이미 그런 생각이 들어서 쓰는 글이다.